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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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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完- 그날 내리던 비가 그치지 않은 것처럼, 거무스름한 구름이 가린 하늘은 여전히 빗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젖은 풀냄새, 떨어지는 빗물이 바닥에 고인 웅덩이와 부딪히며 투둑거리는 소리. 에리를 떠나보낸다. 아니, 에리가 내 곁을 떠나간 건 한참 전의 일.에리는 이미 날개의 깃털을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날아가버렸다. 에리와 지낸 시간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행복함을 느꼈다.소중한 추억들과 수없이 많은 감정을 마음속에 새겼다. 『아야세 에리』돌에 새겨진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자,거친 숨을 쉬며 생기를 잃어가는 차가운 에리의 몸의 감촉과, 에리를 껴안고 눈물 흘렸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이젠 에리를 볼 수 없다.사진과 영상,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져가는 기억으로만 되새길 수 있는, 사라져버린 사람.그렇게 생..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4- 날개를 잃은 천사는 연인을 기다렸다. 연인은 천사를 찾아오지 않았다. 천사는 날개가 사라진 어깨를 더듬으며 연인이 찾아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연인이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연인은 천사를 찾아오지 않았다. 천사는 마음을 접고, 혼자 날아오를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천사는 날개가 없기에 날아오를 수 없다. ... 마침내 연인이 천사를 찾아왔을때, 연인은 천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 - 팡- 알록달록한 무지개 무늬 우산을 펼치고 호무라의 입구를 벗어난다. 몇 발자국 걷기가 무섭게 우산 위로 빗물이 쏟아져내리며 후두둑하고 소리를 낸다. 어제만 해도 다같이 옥상에서 연습할 수 있을만큼 맑은 날씨였는데-한여름의 날씨라는건 정말 변덕이 심하다. 우산이 미처 가리지 못한 부분으로 비가 ..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3- 「뭐!?」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마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많이 놀랐는지 마키 특유의 목소리가 옥상난간을 넘어 음악실까지 들릴 것 같았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로, 마키보다 더하면 더했지 침착한 사람은 없어보였다. 「호노카, 진심입니까?」 「응! 다함께 에리를 위한 라이브를 하자! 다른 관객은 부르지 않고, 에리만을 위한 무대를!」 이것이, 내가 생각해낸 해답이었다. 「전 반대합니다. 지금의 에리가 라이브를 본다고 해서 기운을 되찾는다는건 힘들거라 생각해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무모해 보이는 방법이니까, 반대라면 각오하고 있었다. 「무모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에리쨩을 위해서 라이브를 하고 싶어!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2- 「에리쨩... 괜찮은 거 맞지? 응?」 나도 모르게 다그치듯이 물었다. 불안함이 목소리에 묻어나 가늘게 떨렸다.옆에 선 우미와 코토리, 그리고 1학년들까지. 모두가 경직된 표정으로 에리를 바라봤다. 에리가 가벼운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숨을 들이켰다.그 숨쉬는 소리가 병실안에 가득 울려퍼졌을 정도로, 다들 호흡하는것조차 잊어버리고 에리가 할 말에 집중했다. 에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평생, 제대로 걷지 못할 수도 있대.」 에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웃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웃고있는 에리의 얼굴은 우는것보다도 훨씬 슬퍼보였다. 에리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고 있었지만, 눈동자 속에는 우리가 담겨있지 않았다.하늘이 비치는 연못만큼 맑고 푸르던 에리의 눈이, 바닥이 갈아엎어진 웅덩이처..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1- 평화로운 일상이, 호노카와 함께 잡은 손이.지금 이 순간 하나하나가 내겐 너무나 소중해서, 언제까지고 계속 되길 바랐다. 장애물이 나타난다면 서로 어깨를 기대며,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누가 보란듯이 자신만만하게 외칠 때도 있었다.언제든지 호노카와 함께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장애물은 생각한것보다 수십배만큼이나 거대했다.가까이 다가가려 하는것만으로도 짓눌리고 상처를 입었다.아픔을 참고 온힘을 다해 밀어내려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커지기만 해서, 포기하고 싶어졌어. - 「우와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8월의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꽤 긴 시간동안 걸어다녔기에 땀이 뺨을타고 주르륵 흘러내렸지만.그 노력을 보상해주려는 듯, 알록달록 예쁜 꽃으로 가득 찬 공원이 눈앞을 반겨주자 기운이 잔뜩 ..
별의 곁에 머물고 싶어 -完- [이전 이야기] 재수 이후 의사 면허 시험에서 여러 번 탈락한 마키는 점점 무감각한 삶을 살아간다.그러던 도중 수년간 연락이 끊겼던 니코와 우연히 마주쳐 연락하고, 니코의 초대로 라이브 공연을 직관한다.하지만 니코에게 옮은 감기 때문에 도중에 뛰쳐나와 쓰러진다.공연을 끝마친 후 마키를 찾아낸 니코는 쓰러진 마키를 부축해 집으로 데려온다. - - - - 「오늘 당번인가보네?」 방과 후 혼자 부실의 책상을 열심히 닦고 있던 니코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니코는 고개를 저었다. 「난 부장이잖아. 다른 애들한테 청소를 맡길 순 없지.」 「나도 도울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신경 안 써도 괜찮아. 마키는 지금까지처럼 뮤즈를 위해서 좋은 노래를 만들면, 그거로 됐어.」 그렇게 태연히 말했지만 니코는..
별의 곁에 머물고 싶어 -3- 마키는 책상에 턱을 괸 채 티켓을 눈앞에 대고 살랑살랑 흔들었다.니코의 단독 라이브의 최전열 티켓.너무 작아서 아직도 어린 아이같은 손으로 티켓을 내밀며「와줄 거지?」하고 조심스럽게 묻던 니코. 마키는 창문 너머로, 니코의 자그마한 입에 커다랗게 피어난 함박웃음을 떠올렸다.자연스러운 웃음.미래에 대한 걱정보다 현재의 열정에 충실한 웃음.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웃음. 마키가 멋대로 해석한 것일 뿐이지만, 니코의 미소는 그녀가 가진 엉성한 미소와는 달랐다.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웃으면 저절로 기쁜 감정이 생겨난다는 유명한 말이 생각나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렸다. 창문에 비친 마키의 웃음은, 지켜보는 사람을 웃음짓게 만들정도로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그녀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주진 못했다. 「순 엉터리..
별의 곁에 머물고 싶어 -2- 「...오랜만이야.」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긴 연락의 공백은 서로에게 어색함을 남긴다.니코 쪽에서도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래. 오랜만이네.』 「…….」 『마키. 방금 전엔 왜 도망친 거야? 아니, 그보다 이 근처에 사는 거였어?』 「...이것저것 일이 있어서. 혼자 자취해.」 『일?』 「응.」 전화기를 잡은 손끝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제발 그 이상은 묻지 말아줘' 라는 바보 같은 심정이 니코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어버린게 후회스러웠다.지금까지 줄곧 니코와는 연관되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왜 니코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지?우연히 니코와 마주쳤을 때 느꼈던 기쁨 때문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