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이야기]
재수 이후 의사 면허 시험에서 여러 번 탈락한 마키는 점점 무감각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도중 수년간 연락이 끊겼던 니코와 우연히 마주쳐 연락하고, 니코의 초대로 라이브 공연을 직관한다.
하지만 니코에게 옮은 감기 때문에 도중에 뛰쳐나와 쓰러진다.
공연을 끝마친 후 마키를 찾아낸 니코는 쓰러진 마키를 부축해 집으로 데려온다.
- - - -
「오늘 당번인가보네?」
방과 후 혼자 부실의 책상을 열심히 닦고 있던 니코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니코는 고개를 저었다.
「난 부장이잖아. 다른 애들한테 청소를 맡길 순 없지.」
「나도 도울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신경 안 써도 괜찮아.
마키는 지금까지처럼 뮤즈를 위해서 좋은 노래를 만들면, 그거로 됐어.」
그렇게 태연히 말했지만 니코는 이마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책장과 전시장을 꼼꼼히 닦았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축 늘어질 만한 더운 날, 키가 닿지 않는 높은 곳까지 까치발을 들고 낑낑대며 팔을 뻗는 니코의 모습은 동물이 나무에 매달린 과일을 먹으려고 애를 쓰는 것만큼이나 귀여웠다.
「무리하지 마. 키도 안 닿으면서.」
「자, 잠깐! 그렇게 닦으면 안 돼! 유리에 지문이 다 묻어버리잖아!!」
니코에게서 걸레를 뺏어 높은 곳을 닦으려했지만 난생 처음 해보는 걸레질은 생각보다 어려워서, 니코의 잔소리를 잔뜩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꽤 공을 들였더니 결국 깔끔하게 닦아내는 데에 성공.
「다했다!」
「생각보다 힘드네. 지쳤어.」
「그러게 안 도와줘도 된다고 했잖아.」
「내가 없었으면 해가 질 때까지 다 닦지도 못했을 걸? 기껏 도와줬더니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고마워.」
니코는 선수 치듯이 마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감사 인사를 하더니 씨익 웃었다.
그때, 처음으로 니코의 미소를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에 날려 온 민들레 씨가 땅에 자리를 잡고 싹을 틔운 것처럼, 그때의 미소는 아직도 마음 깊숙이 자리잡은 채 잊히지 않았다.
-
눈을 감은 채로 반쯤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건 왼쪽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였다.
너무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손끝의 온도.
살과 살이 맞닿은 감촉이 기분 좋아서 손을 떼고 싶지 않다.
잠의 세계에서 점점 끌어올려지며 여러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매끈한 감촉과 이따금 새근거리며 정적을 깨는 숨소리.
그리고 그 호흡에서 풍겨오는 딸기 향에 가까운 향기가 코끝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마키는 향기와 감촉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기억해내기 위해 일부러 눈을 뜨지 않고 여유를 만끽했다.
잠시 후 눈을 뜬 마키는 순간 숨을 멈췄다.
눈앞에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니코가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채 잠들어 있었다.
아기 같은 모습. 마키는 니코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니코의 자그마한 어깨는 호흡을 따라 조금씩 들렸다가 내려가길 반복했다.
니코에게 뭔가 덮어주고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마땅히 덮어줄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아 별 수 없이 그냥 일어났다.
하품 후에 정신이 멀쩡해지자 잠들기 전의 일이 떠올랐다.
니코를 억지로 끌어당겨서 입맞춤을 했던 기억, 입술에 찾아온 감촉…….
「으.. 바보같이 무슨 짓을 한 거야!」
니코가 잠에서 깨려는 듯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깜짝 놀라 숨을 가다듬었다.
잠든 니코의 모습을 보자 기억이 다시 떠올라서 얼굴이 폭발하는 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부끄러웠다.
아마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거야.
신경을 다른 쪽으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방 구석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실과 바로 이어진 널찍한 방은 니코다운 어린이 같은 취향이 그대로 반영되어 화려한 원색 계통의 가구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마키가 누워있던 조금 큰 소파는 누워서 창문위의 하늘을 올려다보기 좋은 위치에 배치돼있었다.
그 소파 위에선 여전히 니코가 불편한 자세로 누워 꿈나라에 빠져있었다.
창문 양쪽에 쳐진 물방울무늬의 하늘색 커튼 틈에서 들어오는 미적지근한 햇빛을 보니 시간은 늦은 점심에서 이른 오후 정도.
니코에게 키스를 하고 잠들었던 때는 아침이었던가.
얼마나 지났는지 대충 시간을 계산하자 배고픔과 흡연 욕구가 일어났다.
마키는 소파 근처의 탁상에서 핸드폰과 담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칙- 칙-
불붙은 담배를 입에 물고 발코니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동네 경관을 구경했다.
시가지와 가깝긴 하지만 비교적 값싼 원룸에서 자취하는 마키와 달리 니코는 꽤 깔끔한 아파트 단지에서 사는 모양이었다.
화창한 날씨에 거닐기 좋은 공원과 아이들이 시끌벅적한 놀이터, 공원과 놀이터를 둘러싼 몇 개의 아파트.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은 사람 소리보다는 정원을 찾아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더 잦았기에 조금 생소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소도 마냥 싫지만은 않네.
니코의 발코니는 창밖으로 담뱃재를 털어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만큼 조금 높았다. 마키는 스스로 머리에 손을 대보았다. 별로 뜨겁지 않다.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을 때도 기침을 하지 않았으니, 감기가 거의 다 나은 걸까.
「마키.」
「일어났어?」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니코가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엉거주춤하게 앉아 손을 흔들었다.
「저.. 어제 일은.」
「어제가 아니고 그저께야. 너, 이틀 동안 누워있었으니까.」
마키는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해 대답 없이 니코의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말 몇 마디면 분위기가 풀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무 말도 꺼낼 수 없다.
어색한 공기는 점점 굳어져 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키는 니코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했지만, 다물어진 입술이 좀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니코도 이틀 전 일이 생각났는지 마키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고 어색한 정적은, 잠시 후 니코가 일어나면서 깨졌다.
니코가 부엌으로 향한 후 미닫이 문 너머에서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와 칼로 채소를 써는 소리, 가스레인지에서 딸깍거리며 불이 피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키는 달리 연락할 사람이 없으면서도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펼쳤다.
시간은 오후 두 시. 지도 어플로 자취방까지의 거리를 확인해보니 넉넉히 두어 시간은 잡아야 했다.
오토노키에 재학중일 땐 한 시간도 안돼서 니코에게 찾아올 수 있었는데, 그때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버렸다.
이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두 사람이 밤의 번화가에서, 그것도 어두운 뒷골목에서 마주치다니.
어쩌면 저번의 만남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어느새 준비가 다 됐는지 니코가 손짓했다.
이전 같았으면 끝없이 재촉해도 모자랐을 판에 손짓이라니.
말 몇 마디 꺼내는 걸 싫어할 만큼, 큰 실수를 해버린걸까. 마키는 무거운 분위기에 억눌려 마지못해 부엌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 위의 음식들은 알록달록한 그릇에 예쁘게 담겨 있고 좋은 냄새가 났지만,
맞은편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밥을 먹는 니코 때문에 밥 대신 모래알을 씹어 삼키는 기분이었다.
「니코.」
말없이 밥을 먹던 니코가 그제야 마키를 쳐다봤다. 명령을 받은 기계도 지금의 니코보다는 덜 딱딱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분위기는 안 좋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사과할 타이밍이 마땅치 않다.
「저.. 미안해. 핑계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땐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
「다 먹었으면 나가줘.」
「에...?」
「못들은 척 하지 마.」
「하지만」
「그리고, 이제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니코도 나를 좋아하고 있지 않을까」하는 바람이, 담배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키는 니코를 사랑한다.
하지만 니코는 마키를 사랑하지 않는다.
어쩌면,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일지도 모른다.
늘 더 좋아하고 상대에게 더 매달린 건 마키였다.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고 억지를 부렸을 뿐.
니코에게 억지로 한 키스는, 니코의 입장에서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키를 싫어하게 만들기 충분한..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옷가지와 가방을 최대한 빨리 챙겼지만 팔다리가 후들거려 손으로 잡기가 힘들었다.
「미안해... 니코. 미안..」
마키는 현기증을 느끼며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아냈다.
여기서 눈물을 터뜨린다면, 상냥한 니코의 마음이 약해질지도 모른다.
철컥- 쿵.
문고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
「콜록- 윽, 우윽-」
마키는 여섯 번째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헛구역질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한 어지러움이 찾아와 손으로 벽을 짚었다.
너무 많이 폈나.
여러 번 구역질을 했지만 입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며칠 전 니코의 집을 떠나올 때 이후로 먹을것도 전혀 먹지 않았다.
휘청거리며 걸어온 마키는 쓰러지듯 몸을 눕히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이 들면 죽고 싶을 만큼 심한 어지러움과 두통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삐-
구석에 처박아뒀던 핸드폰이 시끄럽게 소리를 냈다. 니코의 전화인가 싶어 잽싸게 펼쳤지만 파파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마키.』
『집으로 돌아 오거라.』
기분 탓일까. 파파의 목소리는 어딘가 경직되어있었다.
「붸에에?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마키. 의사가 되고 싶지 않은 거니?』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왜 이번 면허 시험에 신청하지 않은 거니?』
그 말을 들은 직후, 마키는 근래 면허 시험에 대해서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짜를 곱씹어보니 그저께가 면허 시험 신청의 마지막 날이었다. 시험은 한 달 후였지만 신청은 그보다 더 일찍 해야했다.
신청을 하지 않은 이상, 다음 시험까지는 4달이나 더 기다려야했다.
『네가 혼자 자취한다고 말했을 때 걱정하던 네 엄마를 설득시킨 건 나였다. 네가 그만큼 강인한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마키 너라면 시험에서 몇 번 떨어진 것 정도는 극복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거든.』
「...」
파파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전화기를 타고 전해지는 미세한 호흡은, 아주 조금이지만 눈물을 머금은 것 같기도 했다.
『일단 돌아오거라. 바로 옆에서 네가 공부하는 것을 전력으로 도와줄 테니까. 정 힘들다면 의사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해도 괜찮아.』
「..응.」
거부할 수 없었다. 몇 년간의 자유는 마키에게 나태함을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대학에 재수하던 그 때처럼,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니코를 잊어버리기에도 좋은 기회였다.
『네 친구도 충분히 이해했을 거야.』
「친구...?」
등을 벽에 기대고 있던 마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일주일 전이던가. 네 친구가 널 업고 자동차로 들어가는 사진을 인터넷 기사에서 봤다.
그 기사를 보고 걱정돼서 네게 전화했더니 친구가 대신 받더구나.』
전화를 대신 받았을만한 사람은 니코밖에 없다.
「그 아이에게 네 사정을 설명했다. 스쿨 아이돌을 하던 때부터 알던 아이니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네가 아이돌 공연 같은 쓸데없는 유흥거리에 빠져있을때가 아니니 한동안 만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 네 친구도 충분히 납득 했....』
그 순간,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삐- 하고 들려오는 머릿속의 기계음이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감춰버렸다. 머리가 터질듯이 아팠다.
아픔은 금방 사라졌다. 그 후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는 그 몇 초의 순간 동안, 불현듯 니코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니코는 상냥하다.
그 말을 하던 니코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었다.
전화를 대신 받은 니코는, 파파의 말을 듣고 마키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을 것이다.
니코는 상냥하니까.
『방은 몇 달 후면 계약이 끝나니까-』
「누구 마음대로..」
『마키?』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말한 거야! 나랑 니코의 관계는 공부 따위랑 아무 상관도 없다고!」
『난 네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신경써주는』
「그런 거 전혀 필요 없어!」
퍽.
「으으-」
핸드폰을 벽에 던져버리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호흡이 점점 더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다시 주워 배터리를 끼웠다. 벽에 부딪힌 탓인지 핸드폰 액정에 세로로 길게 금이 가 있었다.
『니코쨩』이라 적힌 연락처에 통화 버튼을 누르고 숨을 들이마셨다.
급한 마음과 다르게 핸드폰에서 울려 퍼지는 발신음은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건너편에서 니코의 목소리가 들리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하지만 니코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안내음을 들으며 무력하게 팔을 늘어뜨린 마키는 조소와 함께 눈물 몇 방울을 떨어트렸다.
지금 니코가 전화를 받는다 해도 니코를 설득할만한 방법이 없다는 건 마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마키는 정체되어있다.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걸어가곤 하는, 때론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걸어가는 길.
그 길 위에서 마키는 주저앉아 사람들의 뒷모습만 우두커니 쳐다본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니코도, 파파도 그런 마키를 도와주려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의사가 될 수 있는 것도, 멈춰선 길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니코가 없으면 할 수 없어.」
마키는 곧장 옷을 챙겨 입고 핸드폰과 지갑만을 들고 집을 나섰다.
-
「니코! 니코!」
쿵 쿵 쿵.
니코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초인종을 눌러도, 문을 두드려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 힘은 점점 약해지고, 목소리도 작아졌다.
무작정 찾아온다고 될 일이 아니었는데.
마키는 등을 문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았다. 스스로가 영악하다고 생각했다.
니코가 상냥하다는 걸, 마음이 약하다는 걸 알고 찾아온 거니까.
차라리 이대로 열어주지 않는 게 더 좋을 지도.
아파트 복도의 난간 위로 하늘이 보였다.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맑던 하늘이 땅을 향해 비를 들이붓고 있었다.
우산을 안 가져왔다는 사실이 기억났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곧 밤이 찾아올 테고, 여기로 오길 결심했을 때부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있지도 않았으니까.
파파는 아까 전의 통화가 끊어진 후부터 해가 떨어진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걸려오는 수 통의 전화중 단 한통이라도 니코의 전화이길 바랐지만, 결국 핸드폰 화면에 『니코쨩』이라는 글씨는 한 번도 표시되지 않았다.
마키는 다시 한 번 니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받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점점 더 강하게 쏟아지는 비가 복도 난간을 지나쳐 마키의 얼굴을 때렸다.
-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뮤즈의 모두가 준비했던 옥상의 라이브에서 호노카가 쓰러진 날.
급히 파파에게 연락해 병원으로 호노카를 보낸 후, 모두의 표정은 하늘에 넓게 퍼진 비구름만큼이나 어두웠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마키 또한 아마 다른사람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들 별다른 말없이 호노카에 대한 걱정, 대실패한 라이브 결과에 실망이 반씩 섞인 얼굴로 한명씩 교사 밖으로 떠났다.
마키는 린과 하나요를 먼저 보내고 혼자 복도를 걸었다.
열심히 만들어낸 곡에 가사를 붙여준 우미, 공연 의상을 준비해준 코토리.
라이브 날이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아침일찍부터 방과후까지 시간 내 연습한 모두의 모습이 한 차례씩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아픔이 느껴질 만큼 주먹을 꼭 쥐었다.
우미가 말했듯 이번 일이 호노카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혼자 무리한 호노카의 책임이기도 했지만 2학년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 채지 못한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피아노라도 치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에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아이돌 연구부실을 지나고 있을 때, 부실에서 미약한 빛이 새어나왔다.
마키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었다.
부실의 불은 켜져있지 않았다.
문 틈새로 새어나오던 빛의 정체는 문 정면에 위치한 모니터. 그 앞엔 니코가 앉아있었다.
니코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니코의 바로 뒤까지 다가가자, 그제야 니코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걸 알아챌 수 있었다.
마키는 니코가 모니터에 띄워놓은 러브라이브 랭킹을 띄운 화면을 보고 숨을 죽였다.
18.. 19.. 20.
러브라이브에 출전할 수 있는 건 20위. 그 안에 뮤즈의 이름은 없었다.
니코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으려다 주춤했다.
내가 위로해줄 수 있을까? 니코가 아이돌에 걸고 있는 꿈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마..키?」
기척을 느꼈는지 니코가 등 뒤를 돌아봤다. 재빨리 소매로 닦아냈지만 눈 아래가 발갛게 부어올라있었다.
「이 시간까지 뭐하는 거야? 다들 돌아갔을거라구?
난 라이브 영상 업로드가 잘 됐는지 확인좀 하려고 잠깐 들렀어.」
「아 맞다, 마키! 시간 괜찮으면 아픈 호노카가 들으면 좋을만한 노래로 연주를 해가면 어때?」
「니코.」
「왜?」
「..아냐. 연주할만한 곡이 몇 개 있어. 음악실도 아직 열려 있고.」
「그럼 같이 가자. 호노카가 얼른 기운 차리는 게, 뮤즈 전부를 위해서도 좋아.」
「응.」
‘괜찮아?’ 라던가, ‘힘내’ 같은 말은 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한 니코의 태도 뒤에 깊게 그늘져있는 그림자.
마키는 그 어두운 곳에 손을 뻗어 니코를 구해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
「마키.」
그리운 목소리. 그렇게 듣고 싶었던... 니코의 목소리.
깜빡 잠이 들었었는지, 방금 전보다 몸이 훨씬 축축했다.
「니코.」
간단한 외출용 복장을 걸친 니코는 팔에 조금 큰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니코도 갑자기 내린 비를 미처 피하지 못했는지 어깨 언저리가 흠뻑 젖어있었다.
니코의 빨간 눈이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뜨여졌다. 마키가 집 앞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
「문 앞에서 비켜 줘. 집에 들어가야 하니까.」
「니코한테 할 말이 있어.」
「다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마지막으로 봤을 때 말했잖아.」
「...」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태도였다.
마키가 뒤로 물러서자 니코는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는 현관 옆의 서랍에서 우산을 꺼냈다.
「가져가. 비 오니까.」
「잠깐..!」
텅.
닫혀가는 현관을 억지로 붙잡아 열었다.
「파파한테 다 들었어. 파파가 니코한테 전화로 이상한 말을 해서 그렇잖아?
분명 니코가 내가 공부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느니, 내 앞길을 막지 말라느니 하는 식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 거지?
그 날도.. 니코는 억지로..」
「억지가 아니야!」
니코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온 그 순간, 비구름 사이에서 뛰쳐나온 천둥이 눈앞을 하얗게 만들어버렸다.
「...」
「마키. 내가 예전에 네 고백을 왜 거절했는지 알아?」
「널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아니, 오히려 네가 너무 좋았어. 고백을 받았을 땐 가슴이 터져버릴것 같았다구?
하지만.. 그때 네 마음을 받아줬다면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아이돌을 포기해야만 했어.
그래서 거절한 거야. 난 너 대신 꿈을 선택한 거라고!
친구는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 그게 나야.」
니코가 서 있는 현관 안쪽은 무척이나 어두워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니코는 떨고 있었다.
「아니, 니코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착각 하지 마! 난 네 걱정 따위 조금도 안하니까..
지금도 마키가 비에 흠뻑 젖었는데, 감기가 다 낫지도 않았을 텐데도 쫓아내려 하잖아!」
「그럼.. 니코가 나쁜 사람이라면.. 지금 왜 울고 있는 건데?」
「...」
니코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뺨을 만진 손이 따듯하게 젖어 들어갔다.
거세게 내려치는 빗소리에 니코가 흐느끼는 소리가 섞여있었다.
「손 떼. 지금 이러는 것도 다 널 위해서니까..! 내가 옆에 있으면, 네가 영영 의사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너희 아버지가 그랬어!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날 위해서라면, 내가 바라는대로 해주면 안되는 거야..?」
「그럴 수 없는 거 알잖아!」
마키는 니코를 끌어안았다. 두 팔로 끌어안기 충분할만큼 작은 어깨였지만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나랑 있어줘...
니코랑 마주쳤던 그날 아침엔, 확 죽어버릴까도 생각했었어.
매일,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바닥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높은 벼랑 끝에서 등을 떠밀려지는 것 같았어.
하지만 그날 니코의 얼굴을 다시 본 것만으로도.. 난 힘을 얻을 수 있었어.」
「그렇게 상처를 줬는데도? 널 포기하고 꿈을 선택한 나쁜 사람인데도?
거절하면 네가 아파할 걸 알면서도 애써 무시하고 잊어버린 사람인데...!」
「아냐.」
비가 멈춰버린 것 같이, 니코의 흐느낌만이 주변을 가득 채운다.
「꿈을 위해서 친구를 버린 사람이 공연을 끝마치자마자 사라진 친구를 찾아다니지는 않아.
내 아픔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받지도 않는 전화를 몇 년 동안이나 계속 걸지 않았을 거라고!」
「...」
「니코는 상냥해... 그리고.. 난 상냥한 니코가 필요해.」
니코가 얼굴을 파묻은 오른쪽 어깨에서 뜨겁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마 니코도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
선선한 밤바람이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와 몸을 쓸어냈다.
비가 그친 후의 하늘은 무척 조용했다. 모든 비를 쏟아낸 하늘은 잠잠했고, 종종 나뭇잎 끝에 맺혀있던 빗물이 떨어지며 정적을 깼다.
불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마키와 니코는 손을 맞잡고 벽에 기대 앉아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떻게 설득할거야?」
「...분위기 깨지마.」
「혀, 현실적인 문제잖아!」
마키는 머리끝을 손가락에 감았다가 풀었다.
「니코. 아까 고백은 물러줘.」
「뭐어?」
「잠자코 듣기나 해.」
「내일 파파랑 마마한테 돌아갈 거야. 집에 박혀서 바깥 공기가 그리워질 만큼 공부해서 다음 시험에 붙으면, 정식으로 니코한테 고백할게.」
「잠깐.. 그럼 왜 굳이 오늘 날 찾아온 건데? 시험에 합격하고 찾아왔어도 됐잖아.」
「달라. 정확히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길의 끝에 먼저 도착해서 날 기다려줄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랄까,
눈앞에 있는 게 딱딱하고 높은 벽이 아니라 니코가 내민 손이라는 확신.. 그런 게 생겼으니까.」
「마키답지 않게 감상적이네.」
「그 말, 무슨 뜻이야? 의미를 모르겠네.」
대답대신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니코를 돌아봤다. 한밤중에 불까지 꺼져있어 얼굴은 잘 안 보였지만, 커다랗고 빨간 니코의 눈동자만큼은 달빛을 가득 담아낸 별의 호수처럼 또렷하게 빛났다.
비가 개인 후의 하늘은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마키는 수없이 많은 별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함께 떠있는 두 개의 별을 바라봤다. 외톨이처럼 혼자 흐릿하게 빛나는것처럼 보였던 별은 외톨이 별이 아니었다. 도심의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었지만, 사실은 다른 어느 별보다도 환하게 빛나는 별이 바로 옆에서 함께하고 있었다.
「저기.. 니코, 나 담배 끊을까?」
「별로 안 끊어도 상관없지만. 갑자기 왜?」
「담배 연기가 니코를 가릴 까봐.」
「풉.. 큭- 뭐라는 거야.」
니코의 웃음에 미소로 화답했다.
더 이상 볼 수 없을만큼 멀어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별.
그 별은 늘 곁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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