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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장편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1-

평화로운 일상이, 호노카와 함께 잡은 손이.

지금 이 순간 하나하나가 내겐 너무나 소중해서, 언제까지고 계속 되길 바랐다.


장애물이 나타난다면 서로 어깨를 기대며,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누가 보란듯이 자신만만하게 외칠 때도 있었다.

언제든지 호노카와 함께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장애물은 생각한것보다 수십배만큼이나 거대했다.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것만으로도 짓눌리고 상처를 입었다.

아픔을 참고 온힘을 다해 밀어내려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커지기만 해서,


포기하고 싶어졌어.


-


「우와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8월의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꽤 긴 시간동안 걸어다녔기에 땀이 뺨을타고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그 노력을 보상해주려는 듯, 알록달록 예쁜 꽃으로 가득 찬 공원이 눈앞을 반겨주자 기운이 잔뜩 솟아났다.


양손에 쥬스를 사들고 걸어오는 에리를 향해 소리쳤다.


「에리쨩!」


에리는 대답대신 손을 번쩍들어 흔들더니 싱긋 웃었다.


에리가 도착때까지 참을 수 없어, 재빨리 달려가 쥬스를 낚아챘다.


「잘 먹을게!」


「이렇게 날씨가 더울 줄 알았으면 다음에 오자고 하는건데.. 미안.」


「걷는것도 좋아하니까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네. 저... 호노카, 내일 생일인데 뭐 가지고 싶은거 있어?」


「음- 가지고 싶은거라기보다는.. 케이크가 먹고 싶어. 커다랗고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


내가 두팔을 크게 벌리며 말하자 에리가 입을 가리고 「호노카 답네」하고 쿡쿡 웃었다.


「일단 가자. 보여주고 싶은게 있어. 빨리!」


「호노카! 조금만 천천히가-!」



에리와 손을 잡고 커다란 공원을 쉴틈없이 돌아다닌다. 

한여름에 절정기를 맞아 화려하게 피어난 꽃들이 만들어준 길을 걸으면, 왠지 행복해지는 것 같아.

혼자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것이 즐겁다. 함께하는 사람이 에리라면 더더욱.



팔짱을 낀 채로 소란스럽게 돌아니는 여자 아이들과 뒤를 따라가는 부모들이, 마치 꽃을 찾아다니는 나비 같아 보였다. 

날씨 때문인지 저마다 슬러시나 생수같은 마실 것을 손에 들고 웃음소리를 가득 퍼트리며 공원을 누볐다.


종종 에리가 나를 멈춰세우고는 「자, 향기를 맡아봐.」하고 꽃을 내밀면, 상큼하거나 달콤한 꽃향기가 한가득 퍼져온다.

에리가 꽃향기를 맡으면 내가 따라서 맡고, 내가 웃으면 에리가 따라서 웃었다.


이 짧은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시간보다도 행복했다.



삼십분쯤 걸어다녔을까, 슬슬 보일때가 됐는데...


아!


「에리쨩. 저기 봐, 저기!」


공원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 해바라기 화원! 

저마다 다른 크기를 가진 주홍빛 해바라기들이 태양을 바라보고있었다.


「하라쇼- 해바라기가 이렇게 많이 있는건 처음봐!」


에리는 놀란 표정으로 앞에 펼쳐진 해바라기에 탄성을 내질렀다.


지금이 기회야.



「에리! 해바라기의 꽃말, 혹시 알아?」


내 물음에, 에리의 얼굴이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에리는 똑똑하니까 이미 알고있으면 어쩌지- 하고 고민했었지만, 다행히 모르는 것 같아.


「음- 잘 모르겠는데.. 호노카는 알아?」


「'저는 당신만을 바라봅니다' 야!」


사실은 공원 광고 팜플렛에서 본거지만, 원래 알고있던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푸흡-」


「에..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


토라진것처럼 연기하니 에리가 그제서야 말해주었다.


「해바라기를 보고 호노카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꽃말까지 호노카답네.」


「...나 답다고?」


「응. 언제나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언제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호노카. 닮았잖아?」


「그런가-」


에리는 가끔 우미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하곤 하지만, 그런 모습에서 에리의 어른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런 모습은 우미와 노조미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달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


사실 내가 바라보는 태양은 에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부끄러워서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 내가 지나치게 다가가려하면, 에리가 싫어할지도 모르니까.



「이 꽃도 알고 있어?」


에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은 화단을 가리켰다.

옹기종기 피어있는 작은 하늘색 꽃. 에리의 눈동자와 비슷한 색이었다.


「음- 그게- 어-」


「물망초야.」


「맞다, 물망초! 팜플렛에서 봤어. 꽃말은-」


「진실된 우정.」


에리가 물망초를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툭- 하고 꽃을 꺾었다.


「에리쨩? 꽃을 함부로 꺾으면 안되는..」


「그리고, 진실된 사랑.」


「...」


에리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싫다면 거절해도 좋아. 지금 바로 대답해주지 않아도 좋아.」


내게 가까이 다가와 귀에 대고 알수없는 말을 속삭였다.

에리가 들고있는 푸른 물망초가 내뿜는 상큼한 향기와 함께, 에리의 숨결이 와닿았다.


「호노카. 당신만을 바라봐도 될까요?」



-



불길한 예감은, 가장 행복한 시간에 꽃봉오리가 고개를 내밀듯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

정작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 불안함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사건이 일어나는걸 기다리기라도 하듯, 평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초조해지고,

불안감은 점점 더해져 한계까지 치솟게 된다.


마침내 꽃봉오리가 터져나와 숨어있던 불안의 꽃이 활짝 피어나 세상을 덮어버린다면,

그제서야 안도할 수 있을까?



-



『- - -』


『- - -』


『전화를 받을 수 없어ㅡㅡㅡ』


듣고싶던 에리의 목소리가 아닌, 안내원의 친절한 목소리.



「안 받네..」


「저기, 호노카쨩. 에리쨩도 대학때문에 바빠서 그런걸거야.」


「그치만..」



단 둘이 꽃이 펼쳐진 공원으로 놀러갔던 그날부터, 에리의 고백에 즉답해 사귀게 된 지 일년 정도가 지났다.


오토노키를 졸업한 에리가 대학의 모델관련학과에 진학하게되어, 얼굴을 보기가 이전보다 힘들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 일과가 끝나면 집으로 찾아온다고 했었던 에리가,

아침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는 짧은 문자를 보내더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연락이 없다.



「호노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닙니다. 에리에게도 급한 일이 생긴 거겠죠.

   기다리다보면 분명 올거에요.」


「응..」


물론 에리는 나와 다르게 자기 일은 알아서 척척 해내는 사람이니까,

이정도 쯤은 신경쓰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내가 쓸데없이 예민한거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되는 건 잘 알고있다. 하지만 오늘 따라, 에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것처럼 초조한 느낌이다.


그러고보면 3학년이 졸업하기 전에 「호노카는 직감이 뛰어난 편이구마」하고, 종종 노조미가 말했었는데..


아니지, 아니야.

에리에게는 분명 아무 일도.



띠리링-♬


「아 에리쨩이다!」


탁자위에서 쥐죽은듯 조용히 있던 핸드폰에서 경쾌한 벨소리가 터져나오고,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화면에 표시됐다.



「여보세요? 에리쨩!」


『미안, 조금 일이 있어서.. 지금 가고 있으니까 십분정도면 도착할 것 같아.』


「마중갈게! 어디야?」


『여기가 어디냐면-』



어디로 가냐는 마마의 물음에 답할 틈도 없을 정도로 서둘러 집밖으로 나왔다.


우미와 코토리가 같이 가는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거절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오늘 에리와 단 둘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없을테니까.



조금 달려가다가 횡단보도에 막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건너편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황금빛 머리칼이 반짝하고 빛났다.


에리.


모델에 관련된 일을 하다가 급하게 온건지, 굽이 조금 높은 검정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저런 구두, 나는 불편해서 평생 신을 일이 없을 것 같아.


짧게 자른 청바지와 하얀색 블라우스가 에리의 몸매를 더욱 눈에 띄게 해준다.

고등학생때 주로 하던 포니테일헤어 대신 허리까지 늘어뜨린 아름다운 금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람들의 틈에 섞여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에리의 오른손에 들려진 파란색 상자는- 크기로 보아 아마도 케이크?



「에리쨩!」


빨간불로 고정된 신호등을 멍하니 지켜보던 에리가, 이쪽을 바라본다.


「호노카-!」


에리가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큰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차들이 쌩쌩 달려가는 횡단보도를 사이에 둔 채 서로 손을 흔들며 웃자,

하루종일 나를 붙잡고있던 불길한 예감과 걱정들이 비눗물에 씻기듯 사라지는것만 같다.



빨갛게 빛을 내던 신호등이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초록색으로 변했다.

나와 에리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횡단보도의 반대편에서 서로를 향해 걸어갔다.


에리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능숙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에리의 모습은 런웨이를 누비는 모델같았다.


손이 닿을만큼 가까이 다가가면, 먼저 팔짱부터 껴야할까. 아니면 손을 맞잡을까?



행복한 상상에 젖어들어 현실의 감각이 무뎌졌을때.

그때였다.


『빠아아아아앙!!!』


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신경을 긁어내며 횡단보도 전체에 울려퍼졌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자, 자동차 한 대가 무서울정도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동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불규칙적으로 울려대는 경적소리가 운전하는 사람이 제지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렸다.


자동차가 횡단보도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끼이익-하고 바닥에 바퀴가 끌리는 소리가 며칠간 굶은 동물의 포효소리처럼 날카로웠다.



먹잇감을 쫓아가는 회색 야수는, 자신의 희생양을 찾아 반응할 수도 없을만큼 빠르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에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리는 저항을 포기한 토끼처럼, 자신을 향해 거리를 좁혀오는 자동차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숨을 한 번 삼켰다가 뱉을 시간동안 자동차가 에리를 덮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안돼, 안돼, 안돼!


「에리쨩!! 피해!!!」


다급하게 외친 내 말이 에리에게 전해진 것 같았다.

내 말이 신호탄이 되어, 에리의 발이 움직였다.


에리는 재빠르게 반대편 인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달려간다면 피할 수 있어」하고 안심한 순간, 

마음속에서 잠들어있던 불안의 꽃봉오리가 피어났다.



에리가 땅에서 살짝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날개짓을 처음 배운 아기새처럼, 잠깐 허공으로 솟아올랐다가, 털썩-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굽이 높은 구두가 족쇄처럼 에리의 발을 옭아매어 버린것이었다.


급하게 달려오던 자동차는, 에리가 발목을 붙잡은 족쇄에서 벗어날 틈을 주지 않았다.



『에리쨩!!!!』



힘껏 내지른 내 함성이,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자동차들의 경적소리에 파묻혀버렸다.




쿠웅-!


회색 자동차는 에리와 함께 여러 명의 사람을 휩쓸은 후,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전신주에 부딪혔다.



에리, 에리, 에리는...


귀가 먹은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와 쿵쾅대는 심장박동소리만이 머릿속에 울려댔다.



에리를 넓게 둘러싼 채 웅성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비틀거리며 에리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에리쨩! 괜찮아? 응?」


「아으... 아.. 흐윽- 호노카.... 다리가.. 너무 아파..」


에리가 한쪽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천천히 시선을 아래쪽으로 향했다.


「우읍-」


구토감이 일어났다. 

에리의 다리와 발목이, 고장난 장난감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꺾여있었다.


허벅지까지 감싸주던 검은 스타킹이 군데군데찢어져 그 틈새로 피가 맺힌 맨살이 드러났다.

그 끔찍한 광경을, 맨정신으로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에리쨩... 미안해, 미안해...」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에리를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에리의 하늘처럼 새파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내게도 전염된걸까.



에리의 손에 들려있었을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져 엉망진창으로 뭉개져있었다.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


아무 생각없이, 바닥에 닿지 않은 깨끗한 부분의 생크림을 손가락으로 집어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정말.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