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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장편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2-

「에리쨩... 괜찮은 거 맞지? 응?」


나도 모르게 다그치듯이 물었다. 불안함이 목소리에 묻어나 가늘게 떨렸다.

옆에 선 우미와 코토리, 그리고 1학년들까지. 모두가 경직된 표정으로 에리를 바라봤다.


에리가 가벼운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숨을 들이켰다.

그 숨쉬는 소리가 병실안에 가득 울려퍼졌을 정도로, 다들 호흡하는것조차 잊어버리고 에리가 할 말에 집중했다.


에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평생, 제대로 걷지 못할 수도 있대.」


에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웃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웃고있는 에리의 얼굴은 우는것보다도 훨씬 슬퍼보였다.



에리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고 있었지만, 눈동자 속에는 우리가 담겨있지 않았다.

하늘이 비치는 연못만큼 맑고 푸르던 에리의 눈이, 바닥이 갈아엎어진 웅덩이처럼 흐리멍텅하게 변해버렸다.


촛점없는 그 하늘빛 눈동자 속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연인인 나조차도, 어쩌면 에리 본인조차도 모를 거야.



에리가 다친 이후 병실에서 처음 눈을 마주쳤을때 직감했다.


에리의 표정이,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시한부를 선고받은 사람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그 멍한 표정 너머에 어떤 아픔과 고민이 들어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처참히 망가진 에리의 다리와 내 이름을 무의식중에 내뱉으며 눈물흘리던 에리의 모습이,

지금 에리의 얼굴과 겹쳐보였다.



「저... 에리쨩.」


「이만 가줘.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그치만」



「호노카.」


뭐라도 말해보려는 순간, 우미가 팔을 움켜잡았다.

우미가 꼭 쥐고있는 왼쪽 팔을 통해서 떨림이 느껴졌다.


우미도 두려워하고 있어. 떨고 있어.


「호노카쨩.」


코토리도 반대쪽 팔을 붙잡고 나와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저었다.

코토리의 눈에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우린 가볼게. 불편한 점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줘. 파파에게 전해줄테니까.」


「응. 고마워.」


반강제로 끌려나오다시피하며 우미와 코토리에게 잡혀 병실을 나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나오는 마키가 문을 닫기직전, 문틈으로 에리의 모습을 보았다.


에리는 창문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고있었다.

그 모습은, 날개를 잃어버려 하늘 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천사같앗다.


미동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는 에리의 마지막 모습은 정말, 정말 가여웠다.



에리의 기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에리의 입장에서 모든것이 산산히 부숴진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상적으로 걸어다닐 수 없다는 의사의 통보는,

에리가 그토록 바라던 모델의 꿈도, 우리와 함께 했던 아이돌 활동도.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죽을만큼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에리의 모습이,

전철의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처럼 내 머릿속에서 떠내려갔다.


힘에 겨워하면서도 즐거운듯 입안 가득 미소지으며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던 에리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큰 장애물을 떠안게 되었다.



누구도 에리가 다친것이 나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자책하려하면 그렇지 않다며 감싸안아줄거야.


그치만 우리 두 사람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나는 에리에게 아무런 위로도 할 수 없다.



머리위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와 에리는, 아마도 지금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에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에리가 머무르는 병실을 떠난 우리들은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타닥- 타닥- 하고, 병원의 바닥 타일과 신발이 맞닿으며 내는 소리만 백색소음처럼 귀를 건드려댔다.



「니코랑 노조미한테 얘기 했어?」


병원의 입구를 빠져나오며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하나요.

하나요의 말에 다들 경직되자, 마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니코는 요즘 아이돌 견습활동하느라 한참 바쁜데.. 이야기, 해야겠지.」


「감춘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말해야해요. 마키, 니코쪽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알았어. 그럼 노조미에게는 누가 말할거야?」


「...」



조금 전보다 더 긴 침묵이 이어졌다.


노조미와 에리는 나와 우미, 코토리만큼이나 절친하다.

만약 노조미가 에리의 소식을 듣는다면 나만큼이나, 어쩌면 나보다도 더 충격받을지도 모른다.


노조미는 조금 멀리 떨어진 대학에 진학했기에 얼굴을 자주 보기는 힘들지만,

우리의 일이라면 직접 달려와서 도와주거나 종종 상담을 해주기도 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런 노조미에게 고통스런 소식을 전하는 것은, 무너지는 노조미를 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꺼려지는 일일 것이다.



분명 학교고 뭐고 내팽개치고 이곳으로 달려와서 슬퍼하겠지.

눈물흘리며 나를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할게.」


내가 슬쩍 손들자, 우미와 린이 가로막았다.


「호노카는 안됩니다. 차라리 제가 전할게요.」


「그런 거라면 린이 말해도 괜찮으니까..」



「다들 신경써줘서 고마워. 하지만 내가 에리의 연인이잖아?」


「호노카..」



「그리고.. 사고가 일어난 것도 어떻게 보면 나 때문이기도 하니까-」



짝-!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앞이 반짝거렸다. 아픔보다 소리가 더 빨리 귀에 울려퍼졌다.

시야가 아찔하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뺨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감각이, 「네 잘못이야」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안했으면 우미가 했을 거야.」


마키의 얼굴은, 방금 내 볼을 때려서 부어오른 손바닥보다도 더욱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분노를 토해내듯이 투명한 액체를 조금씩 쏟아냈다.


「에리가 죽기라도 했어?」


「...」



「왜 모든걸 포기한것처럼 울상짓고 있는건데?

   내가 알고있는 호노카라면, 쓸데없이 자책하는 대신 에리를 기쁘게 해줄 방법을 찾아냈을거야!」



린이 마키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가 주저하며 뒤로 물러섰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마키를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모두 나에게 해결책을 원한다.

늘 그렇듯이, 내가 앞으로 이끌어주며 모두를 응원해주기를 바란다.


나를 믿어주는 모두의 그런 신뢰가, 지금만큼은 나를 쇳덩어리처럼 무겁게 짓눌렀다.



에리를 기쁘게 해줄 방법,

에리를 기쁘게 해줄 방법.



「있을리가 없잖아.」


「뭐?」


「에리쨩과 여태까지 함께하는 동안,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어.

   저만큼 슬퍼하는 에리쨩을 기쁘게 해줄 방법이 있을리가 없잖아!」


「그건..」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했나봐. 정말, 미안.」


아무런 목적지도 없지만,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우미와 코토리, 아무도 뒤따라오지않았다.

내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이들이니까.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잡아 흘러가는 개울에 던졌다.


조약돌이 수면에 닿으며 퐁- 하고 작은 소리와 함께 파동이 생겨났지만,

그럼에도 개울은 아랑곳하지 않고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지금의 에리에게 나는 자그마한 조약돌일 뿐인 것 같아.

슬픔을 멈출 수도, 도움이 될 수도 없다.


저쪽에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처럼, 물길을 바꿔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개울을 바라보며 잡초가 얕게 자란 공간을 찾아 드러누웠다.

개울에서 퍼져나오는 미약한 흙냄새가, 거부감이 들면서도 기분 좋았다.


누워서 바라본 하늘은, 점점 주홍빛으로 색을 바꾸며 곧 밤이 시작됨을 예고했다.



며칠 동안 하루에 한번씩 에리를 찾아갔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에리는 끊임없이 나를 밀어내려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버리려는 것처럼.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가버린 사람 같았다.



『힘들게 매일 찾아오지 않아도 돼. 난 혼자있는게 훨씬 좋으니까.』


오늘 병실에서 나오기 직전에 에리가 내게 한 말이었다.



에리의 그 모습은, 처음 마주쳤을때와 비슷했다.

스쿨아이돌을 시작하려는 내게 필사적으로 반대하던 에리.

가까이 다가가는 모든것을 얼려버릴 것처럼 차가운 그 모습.


하지만 얼음처럼 보이는 장벽 너머에는, 노을처럼 따듯하고 여린 속마음이 감춰져있다.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


에리가 그런 아이라는 걸.




「언니!」


「유키호?」


갑자기 유키호가 나타나 하늘을 가려버렸다.


유키호는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지금까지 날 찾아다닌 거야?」


「당연하지. 언니가 이 시간까지 연락도 없이 집에 돌아오지도 않으니까!」


「..미안.」


「사과는 마마랑 파파한테 해야지. 자, 일어나.」


유키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자 그제서야 유키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겉으로 티내려고 하지 않지만 날 걱정하는게 눈에 보였다. 


나도 유키호도, 감정을 숨기기 힘든 타입이니까.



요 며칠간 내 감정에 지나치게 매달렸던게 아닐까.

혼자서 모든걸 해결하려고 하다간, 내가 라이브를 망쳐버렸던 그때처럼 모두를 걱정시킬 뿐이다.


유키호와 마마, 파파, 뮤즈의 모두에게 걱정시켜버렸네-


하지만 아직도 해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에리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저.. 유키호.」


「왜 그래?」


「혹시 나한테 해줄 말 있어? 조언이라던가, 충고같은 거..」


벼랑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마음으로 물었다.

하지만 유키호는 고개를 저으며, 의외의 대답을 했다.


「아니. 언니는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


「항상 코토리 씨와 우미 씨에게 기대기만 하던 언니가, 에리 씨와 사귀게 된 이후로 달라지기 시작했잖아?

   에리 씨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다면서.」


「뮤즈를 해산하고 마지막 공연을 하기로 결심했을때도 마찬가지였어.

   언니는 주변에 기대기만 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짠-! 하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멋진 일을 해내는 사람이야.

   언니가 잘할 수 있는게 뭔지, 잘 생각해봐.」


「유키호..」


「난 언니를 믿어. 그러니까, 풀죽어 있으면 안돼! 알았지?」


쑥쓰러운척 얼른 뒤돌아보는 유키호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모두가 할 수 있는 것.


「고마워. 유키호!」


해답에, 조금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