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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장편

별의 곁에 머물고 싶어 -3-

마키는 책상에 턱을 괸 채 티켓을 눈앞에 대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니코의 단독 라이브의 최전열 티켓.

너무 작아서 아직도 어린 아이같은 손으로 티켓을 내밀며「와줄 거지?」하고 조심스럽게 묻던 니코.


마키는 창문 너머로, 니코의 자그마한 입에 커다랗게 피어난 함박웃음을 떠올렸다.

자연스러운 웃음.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 현재의 열정에 충실한 웃음.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웃음.


마키가 멋대로 해석한 것일 뿐이지만, 니코의 미소는 그녀가 가진 엉성한 미소와는 달랐다.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웃으면 저절로 기쁜 감정이 생겨난다는 유명한 말이 생각나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렸다.


창문에 비친 마키의 웃음은, 지켜보는 사람을 웃음짓게 만들정도로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그녀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주진 못했다.


「순 엉터리잖아.」


웃음 짓는 걸 포기하고 괜히 창피해 머리를 베베 꼬았다.


내가 절대로 가질 수 없기에, 그런 에너지를 가진 니코에게 끌리는 게 아닐까.

호노카에게 이끌려 뮤즈에 들어갔을 때처럼.



타닥- 타닥.


모르는 사이 방안에 들어온 작은 나방이 스탠드에 몸을 부딪치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얇은 날개가 뜨거운 전구에 닿아 타는 소리. 조금씩 코를 찔러 들어오는 탄내.


마키는 그 끝없는 부딪힘을 아무 생각 없이 쳐다봤다. 징그럽다거나 기분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상처 입는다는 걸 알면서도 끝없이 빛을 좇는 모습에 동질감이라도 느낀 걸까.

다른 점이 있다면, 홀로 상처를 입는 나방과 달리 그녀는 자신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상처를 입혔다.


저번 만남에서 니코는 분명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과거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 잊어버린 것 같은 태도.


그건 아마 니코가 상냥하기 때문이겠지.


니코가 감추고 있는 속마음을 막연히 상상할수록 가슴이 옥죄어온다.


마키가 과거에 니코에게 했던 행동은 욕망에 가까운 집착이었다.

스스로도 그때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여서, 니코가 원망하고 있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한 가지 마음이 놓이는 건, 니코에게 품었던 사랑으로서의 감정은 이제 다 잊어버렸다는 것.

그렇기에 친구로서 지낼 수 있다. 예전처럼 가까운 친구 사이로.



담배를 피우고 미처 닫지 않았는지 창문이 조금 열려있었다.

나방을 쫓아내고 창문을 닫아버린 후 다짐하듯 숨을 길게 들이켰다가 조금씩 내쉬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진 않아.」


서로 상처입지 않을 만큼 멀고,

서로 온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적당히 가까운 거리.


그 거리가 서로에게 좋다.

좋을 것이다.



-



『도착했어.』짧게 적은 문자를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보내지 않기로 했다.


굳이 알리지 않아도 최전열이라 했으니 니코도 볼 수 있겠지. 라이브 준비하느라 정신없을 거야.

문자에 미련을 갖기 싫어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몸이 공중에 붕 떠있는 느낌이 들었다. 몸에 기운도 별로 없는 게, 감기가 걸린 것 같았다.

니코와 만났을 때 옮아버린 걸까.


괜찮다. 감기정도야 라이브를 보는데엔 별 지장 없으니까.

기침이 몇 번 나왔지만 목을 한 번 가다듬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으슬으슬 추위가 느껴지자 혹시나싶어 챙겨온 목도리를 가방에서 꺼내 두른 후, 핸드폰 전원을 꺼버리고 공연장 건물로 향했다. 

핸드폰 때문에 니코와의 만남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공연장 건물은 입구에서부터 꽤 떠들썩했다.

도쿄돔만큼 엄청난 인파는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사람에 떠밀려 길을 잃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복잡하게 줄을 서 있었다.


이런 경험은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서 클래식 음악 연주회를 갔을 때를 빼고는 처음이었다.

관객석에서 올려다보는 무대, 무대 위의 가수만을 바라보는 수많은 관중들.


관객의 입장에서 라이브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꽤 복잡했다.

기다랗게 이어진 줄 끄트머리부터 시작해 표를 내밀고 들어가기까지 짧지 않은 기다림.


오로지 니코를 보려는 목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보니 괜히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티켓에 적힌 좌석을 찾아가는 것도 꽤 고된 일이었다.

이리저리 헤매다 다른 사람의 길을 막거나 부딪치는 경우가 생겨 몇 번이나 사과해버렸다.


현기증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질수록 어지러움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긴장 때문인가 싶어 양손을 꼭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사람들에게서 최대한 시선을 떨어트리려 애썼다.

오늘 신고 온 갈색 가죽구두의 끄트머리, 맨 앞 열까지 죽 이어진 계단, 좌석 배치도만 번갈아 쳐다봤다.


가까스로 자리를 찾아냈다. 니코의 말대로 최전열.

중앙과는 조금 동떨어진 오른쪽 구석 자리였지만 무대의 열기를 느끼기엔 충분한, 어쩌면 라이브를 처음 접하는 마키에게는 과분한 자리.



짐을 대강 정리하고 모자를 벗자 머리끝에서 후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한번 두 번 심호흡을 하니 그제야 공연장의 풍경이 눈 안에 들어왔다.


아직 니코가 무대 위에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함성을 지르는 관객들의 모습.

스피커에서 베이스 드럼소리가 쿵쿵 울려퍼질때마다 가슴이 같이 뛰었다.

열광하는 관중들의 소리가 귀를 따갑게 할만큼 크게 찔러 들어왔다.


무대 위에서 환호와 찬사를 받으며 노래한 기억만 있었기에 관중석에서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건 생소한 경험이었다.

공연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대상이 니코라는 사실은, 비현실적인 감각을 더욱 더 키워서 지금 순간을 꿈결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오늘 니코의 라이브에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콧!』



연분홍색 프릴이 치렁하게 장식되어 몽실 거리는 치마를 입은 라이브의 주인공.

니코였다.

니코가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무대 중앙에 나타나 귀엽게 손짓하자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귀를 따갑게 만들 정도로 커졌다.



『바로 노래 시작할게요! 처음 곡은- 니코니 니코쨩!』


마키는 잠깐 동안이지만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발랄한 느낌의 안무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커다란 무대를 누비는 니코는, 니코가 아닌 또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함성을 부드럽게 꿰뚫으며 온 공연장에 울려 퍼지는 니코의 목소리.


마법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니코가 움직일 때마다 시선이 니코를 따라갔다.

무대의 저 끝에서 이쪽 끝까지 달리고 때론 여유롭게 거닐며 자태를 뽐냈다.


예전의 니코와는 달랐다.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음정과 안무는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 정도로 훌륭했다.

니코는 그때 그 자리에 멈춰서있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해왔을것이다.


노래의 가사, 멜로디 같은 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마키보다 두 뼘이나 작은 니코가, 공연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커 보였다.


무심결에 니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절대로 잡지 못할 별을 향한 손짓처럼,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마음이 닿은 걸까?

그 짧은 순간, 니코도 이 쪽을 바라봤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붉게 빛나는 두개의 눈동자가 마키의 시선에 대답하듯 별처럼 반짝 빛났다.


앵두처럼 발갛게 칠해진 니코의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미소.

늘 관중들에게 보여주는 미소와는 살짝 다른,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만이 볼 수 있었던 특별한 웃음.


관중을 향한 미소였는지, 아니면 오직 마키만을 위한 미소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 지금껏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싹트는 것을 느꼈다.


『내가 니코에게 품었던 감정..』


아까보다도 훨씬 더 현기증이 심해졌다. 이젠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무의식중에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퍽 두드렸다.


이대로 있다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노래 부르는 니코를 바라보려하면 볼수록, 가슴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옆 사람을 반쯤 밀치다시피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체크무늬 남방셔츠를 입은 남성이 쫓아와 자리에 두고 온 가방을 건네줬다.

남성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넬 겨를조차 없이 재빨리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날 보면 어쩌지? 이렇게 도망가 버리면 니코가 어떻게 생각하겠어?


공연장을 벗어나기 직전, 무대를 향해 뒤를 돌아봤다.


니코는 여전히 관중들을 향해 노래하고 있었다.

마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스윽- 툭.


공연장의 출입문은 조용히 열리고, 조용히 닫혔다.

마키는 다시 한 번 니코와 자신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땅에서 보기에 딱 붙은 것처럼 보이는 두 별은, 실제로는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져있다.

서로의 엇갈린 길은 걷잡을 수 없을만큼 길고도 길게 이어져, 다시 이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공연장의 열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해 밖으로 나왔는데 오히려 더 심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팔을 이마에 얹었더니 타버릴 듯이 뜨거웠다.


「어디로.. 가.. 야..」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커다란 건물 안을 정신없이 휘적대며 걸어 다녔더니 여기가 어디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니코의 노랫소리는 벽 너머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니...코..」


내가 사라진 걸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


흐릿한 시야로 몇 발자국을 걸었는지 의식하기도 어려워질 때쯤, 마키는 반쯤 잠이들었다.


-


『전화기가 꺼져 있어-』


「어디에 있는 거야...!」


니코는 네 번의 통화를 마지막으로 직접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키가 관중석에서 사라진 걸 알아챈 것은 라이브 중반부였다.


분명 처음 무대 위로 올라섰을 때 마키는 최전열석에서 니코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노래 몇 곡을 부르다가 다시 쳐다보니 어느새 마키가 사라져있었다.


라이브가 끝나자마자 스태프들과 매니저에게 인사할 틈도 없이 재빨리 빠져나와 마키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통 받질 않았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실내라서 마스크는 착용할 수 없었고, 아직 건물을 나가지 않은 팬이 선글라스와 모자만 걸친 니코를 알아보는 건 시간문제다.


공연을 보는 도중에 집으로 가버린 거 아니야?


아니. 니코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그녀가 알고 있는 마키는, 그렇게 예의가 없는 아이는 아니다.


어떤 특별한 사정이 생겨서 돌아가버린거라면?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튕겨대던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하자, 니코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공연장을 벗어나는 것도 모자라서, 전화기를 꺼버릴만한 사정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계단을 한발씩 올라가듯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마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점점 더 커져갔다.


아!


마키가 흡연자라는 걸 떠올린 니코는 흡연구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근처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으..」



...이게 무슨 소리야?

주변을 둘러봤다. 공연이 끝난 후 사람들이 다 떠난 로비에 사람이 남아있을 리는 없다.



후욱- 후욱-



방금 전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니 이번엔 미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니코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종종걸음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대기실의 가장자리 소파에 누군가가 쓰러져있었다. 

구석진 위치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이 발견하기 어려워보였다. 

쓰러진 사람은 이따금 작은 신음소리와 숨소리를 흘려내며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키.. 마키잖아?」



「괜찮아? 야! 마키!」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축 쳐진 마키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이마에 손을 짚어보니 엄청나게 뜨거웠다.



「몸 상태가 이정도로 안 좋으면 병원에 가야지 어째서 여기로 온 거야...!」



무엇이 마키를 이렇게까지 무리하도록 만들어버린걸까.



『최전열이라고? 보러 올래? 와줄 거지?』



재회의 날, 마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알고 있다. 니코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서져버린 서로의 연결고리가 겨우 이어질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니코는 비를 흠뻑 맞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키를 이렇게 만든 건 자신의 책임이 컸다.



「으.. 생각보다.. 엄청, 무거...워!」



인형처럼 널브러진 마키를 어떻게든 어깨에 들쳐 메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병원에 데려가는 게 우선이었다.



「아으... 구두 벗고 올걸.」




등 뒤에 업힌 마키 때문에 안그래도 불편한 구두가 발끝을 쑤셔 대서 나도모르게 입에서 아픈 신음을 뱉었다.

아직 건물 안에 남아있는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거나 빤히 쳐다보곤 했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선글라스를 벗고 있음에도 「혹시 야자와 니코씨 맞으신가요?」하며 다가오거나 하는  무례한 팬은 없었기에 안심했다. 



「여보세요? 오늘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공연을 보러 온 친구 몸 상태가 많이 안좋아서요. 네. 네…….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니..코.」



옆에 있는 마키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였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보는 날카로운 디자인의 메탈 귀걸이와 꽤 진한 화장.

부드럽게 다듬어진 머리카락에서도 평소보다 공을 들인 티가 났다.


예쁘게 하고 나왔네.


웃을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마키가 거울을 보며 단장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입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얌전히 누워있어. 병원에 갈 거니까.」


마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원 가기 싫어?」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에 데려다줄게. 주소 어디야?」


「...」



눈을 감은 채 작은 숨을 내쉬는 마키. 그새 잠들어버렸네.



「내가 못 발견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무방비한 거야..」



부드럽게 볼을 쓸어내렸다. 예전의 고지식하고 자존감 넘쳤던 아이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무너진 마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 가슴속에서 죄책감이 터질듯 부풀어 올랐다.

마키의 마음에 벌집처럼 수없이 새겨진 상처중 대부분은 아마 니코의 몫일 것이다.



그때, 차라리 고백을 받아줬더라면..



눈앞이 흐릿해졌다. 니코는 고개를 저으며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 자취방으로 향하는 길을 떠올렸다.

수많은 생각들이 불협화음처럼 머릿속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뒤엉켜댔다.

자동차의 거친 시동 소리에 집중했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리지 않도록.


-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남아있는 기력을 최대한 쥐어짜 겨우겨우 눈꺼풀을 깜빡였다.


「으응ㅡ」


말을 꺼내봤지만 입에선 알아들을 수 있는 말 대신 웅얼거림에 가까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어났어?」


조금 무신경한 것 같으면서도 온화한 목소리. 굳이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멈추자 이마에 차가운 감촉이 찾아와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열이 아직도 엄청 심하잖아!! 안되겠어. 역시 병원에 데려가야..」


뒤돌아가려는 니코에게 손을 뻗어 나지막하게 붙잡았다.


「가지..마.」


마키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가 바람에 휘청거리는 것 같은 힘없는 목소리였다.


니코를 올려다봤다. 어지럽고 눈앞이 흐릿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따듯한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마키..? 정말, 어린애도 아니고 곤란하다니까.. 죽 가져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눈을 감았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푹신한 소파위에 누워있어서인지 포근한 감촉이 몸을 가득 덮어주었다.



내 방엔 이런 소파 없는데. 여긴 니코의 집인 걸까. 민폐를 끼친 걸지도 모르겠네.



몸 상태가 안 좋아서인지 정지한 것처럼 느껴질 만큼 느려진 사고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자! 죽 가져왔어.」



식욕은 전혀 없었지만 니코가 입에 가져다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삼켜내자 몸속에 따듯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절반 정도 먹었을까, 몸이 음식을 거부하는 것 같아 숟가락이 다가올 때 고개를 저었다.

니코는 아무 말 없이 죽을 가지고 방을 나갔다.



눈을 다시 감았다.



서서히 잠에 빠져들어 갈 즈음, 방 바깥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설거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



연인이라는 관계는 서로가 사랑해야 성립되는 관계다.

지금 당장 날 사랑해주지 않는 다해도 상관 없다.

연인이라는 명목으로 니코와 좀 더 오랫동안, 단둘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안 돼.」



처음 고백을 거절당했을 때, 실망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설득하면 분명 니코도 마음을 바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니코는 졸업식이 코앞까지 다가올 때까지도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왜? 대체 왜 안되는 건데!」



마키는 니코의 양 어깨를 움켜잡았다. 니코가 아픈 신음을 내뱉었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일단, 우린 여자잖아? 무슨 의미인지 알아?」



「...상관없어.」



「게다가 둘 다 아이돌이라구? 내가 졸업한 후에도 마키는 2년이나 스쿨 아이돌이고.

   아이돌이 연애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깨를 잡은 손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그것도 상관없어.」



「상관없을 리가 없잖아!」



「그만 두면 되니까.」



「..농담하는 거 아니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커다란 니코의 눈이 더 커다랗게 뜨여졌다.

보석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응시해오자, 마키는 아주 잠깐이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돌은 어차피 졸업하면 끝이야.」



「마키야 그렇겠지만 난 졸업하고도 프로 아이돌이ㅡ」



「프로 아이돌? 정말 될 수 있긴 해?

   만약 된다고 쳐도, 십 년이 채 되기 전에 수명이 끝나는 직업이야. 알고 있어?」



「…….」



「돈이 문제라면 걱정 안 해도 돼. 굳이 파파한테 손 벌리지 않아도, 난 의사가 될 거니까 평생 둘이서 같이 살 수 있을만큼 돈을 벌 거야.」

「내가 일하는 동안 니코는 집에서 편히 쉬고 있어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탁.



니코가 어깨를 잡은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마키. 너 정말.. 최악이네.」



마지막으로 본 니코의 표정은, 분명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미움과 원망이 뒤섞인 듯한 눈빛.



마키는 다리에 힘이 풀려 복도에 주저앉아버렸다.

그 순간 니코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직감했다.


높은곳에서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누군가를 원망할 수조차 없었다.

이어져있던 관계를 깨트려버린 건 마키였으니까.



-





「니..코. 으윽-」



「괜찮아?」



상냥한 목소리. 이마를 짚어주는 손. 부드럽고 상냥한, 니코.



「음- 조금 열이 가라앉긴 했지만 아직 심하니까 누워 있어.」



마키의 눈가에 맺혔던 액체가 볼을 타고 흘러내려가 머리를 적셨다.

방금 꿨던 꿈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척 슬픈 꿈이라는 건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꿈은 머릿속에서 전부 다 지워진 후에도 여운을 남긴다.



「니코.」



커튼이 쳐진 창 밖 너머로 옅은 햇살이 스며들어오고 있었기에, 아침이라 짐작했다.

억지로 허리를 일으켰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한테 밀쳐지기라도 하듯 다시 소파에 고꾸라졌더니 니코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일어나면 안 된다니까! 걱정시키기는.. 제대로 나으면 잔소리 한 마디로 안 끝날 줄 알아.」


따듯하다. 그때와 달라진 것 없이.


니코는 마키와는 달랐다.

마키가 상처를 입혔음에도, 그 후에도 사회에서 수없이 상처를 받았을 터인데도.

속에 품어져 있는 마음은 변함없이 순수한 모습 그대로..



「니코는 변하지 않았네.」



아직도 머리가 어질 거렸다. 짧은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머릿속이 지잉 하고 울려댔다.

욕실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궜을때처럼 나른한 상태.

술에 잔뜩 취한 채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잠든 후의 다음 날 아침 느끼곤 하던 감각.


마키는 스스로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안고 입을 맞출 때, 아직 꿈이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입술을 감싸 안은 감촉은 무척 부드러웠다. 몸을 덮고 있는 구름처럼 포근한 이불보다도 더.

그 감촉에 뒤이어 토마토 샌드위치를 베어 문 것처럼 달콤씁쓸한 맛이 찾아왔다.



「너, 이게 무슨..」



「좋아해. 아직도.」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었어.」



니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설령 니코가 무슨 대답을 했더라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감기, 원래 주인인 니코에게 다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르겠네.


마키는 다시 니코를 곤란하게 만들어버렸다고 후회할 틈도 없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