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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장편

별의 곁에 머물고 싶어 -1-

「후우ㅡ」


아직은 추운 3월의 늦은 밤. 추위가 느껴져 숨을 불어냈지만 입김은 나오지 않았다.

바람이 살짝 불어와 단추가 풀린 재킷을 뒤로 밀어내려했다.

대충 옷을 여미고 팔짱을 꼈더니 한결 따듯해진 기분.


마키는 비니를 눌러쓰고 지겨울 만큼 익숙해진 거리를 주욱 훑어보았다.

이 방향으로 한참 걷다보면 모퉁이, 그 모퉁이를 돈 다음 좀 더 걸으면 편의점.


집 근처의 편의점은 썩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끼니를 값싼 돈으로 해결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적었다.


손가락으로 세려면 손을 열 번은 쥐었다 폈다 해야 할 만큼 편의점을 제집처럼 들락날락했더니, 이젠 편의점 직원이 주로 사는 물품을 기억할 정도였다.

『어서 오세요! 담배는 늘 피던걸로 드릴까요? 아, 오늘은 토마토샌드위치가 떨어졌는데ㅡ』같은 뻔한 인사, 거기에 가식이 잔뜩 섞인 미소는 덤.


옅은 회갈색 웨이브 머리를 치렁대며 미소 짓는 편의점의 여직원.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꽤 오랜 기간 동안 야간 일을 하는 것으로 보아 프리터인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늘 실실 웃는 거야? 나랑 비슷해 보이는 나이에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으면서.』


고개를 휙휙 저었다.


내가 누군가를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람인가? 기분탓인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남을 깎아내리면서 현실을 잊으려하는 스스로가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다.



항상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그 사람이 너무나 부럽다.

가끔 가족을 만날 때 짓는 억지 미소를 제외하면 ㅡ그 억지 미소마저 지어본 지 몇 개월은 지났다ㅡ 마지막으로 웃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곧 있으면 찾아올 생일에 부모님과 만날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파파와 마마의 격려도, 이제는 등에 얹힌 짐을 더 무겁게 하는 효과밖에 없었다.


작년 생일부터 벌써 일 년인데. 내가 그동안 뭘 한거야?

언제부터 이렇게 돼 버린 거지?


「나.. 정말 최저네.」


패배감을 처음 맛본 건 대입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였다.


그때의 마키는 지금과는 달랐기에, 노력에는 늘 결과가 뒤따라올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고통스러운 재수 생활을 꾹 참고 견뎌내 꿈꾸던 의대에 진학한 뒤 졸업과정을 밟았다.


하지만 드디어 꿈앞에 다가섰다고 안심한 그녀에게 생각지 못한 큰 장애물이 찾아왔다.


의사 면허 시험.

파파도, 다른 모든 의사들도 통과한, 의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하는 수많은 관문 중 하나.


누구나 지나치는 관문 중 하나일 뿐.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그 시험에서 마키는 자그마치 네 번이나 떨어졌다.



일 년에 몇 번 도전할 수도 없는, 공백 기간이 긴 시험이었기에 한 번의 실패는 몇 달의 고통을 의미했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준비에 준비를 거듭하고, 실패하고, 다시 준비하고, 또 실패한다.


파파는 『누구나 그 정도 실수는 한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스스로 그런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남들이 한걸음씩 앞으로 전진해나갈때 혼자서 제자리에 멈춰 있는 느낌.

일 년의 재수 생활을 겪으며 수도 없이 느껴본 감각...



처음은 다시 도전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네 번째의 실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패배의식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마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후련해질 때까지 털어놓고 싶었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목록 스크롤바를 올렸다 내렸다 했지만, 결국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린과 하나요, 뮤즈와 함께한 경험 덕분인지 중학교 시절과는 달리 대학에선 친구를 여럿 사귈 수 있었다.

하지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정도일 뿐.


마음을 털어놓을 만큼 깊게 친해지지 못하고, 얕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생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조금씩 걷는 동안, 머릿속에서 『니코』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마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왜 니코가 떠올랐을까? 그때의 일 이후로, 따로 만나거나 전화를 한 적도 없는데.

전화번호를 지워버릴까도 생각해봤지만 차마 지울 수 없었다.


「최저야. 정말...」


과거의 일은 잘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가 바꾸고 싶은 일이 있었다.

주변과 그녀 스스로를 망쳐버리는 선택을 해버렸다고 생각했다.


「됐어. 그거로 됐으니까.」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의 바람이 볼을 훑고 지나갔다.



마키는 소소한 일탈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편의점이 나타나는 모퉁이에서 돌지 않고, 시내 방향으로 그대로 직진.


조금만 걸었을 뿐인데도 전혀 모르는 거리가 나타났다.

가본 적 없는 길을 따라가면, 따분한 일상에서 한 걸음 벗어나 전혀 다른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끊이지 않는 사람들의 말소리, 조금 기름지고 짭짤한 음식 냄새.

떠들썩한 사람들의 열기 덕에 몸이 조금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걸었을 뿐인데도 방금 전의 조용한 거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끌시끌한 분위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시내 중심가의 술집들과 포장마차, 뭐가 즐거운 건지 잔뜩 웃고 떠드는 사람들.


휴일 전날 밤의 거리는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사람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장소였다.

그녀와는 동떨어진, 저마다 자신의 길을 찾아 흘러가는 사람들.


인파에 섞인 채 걷다보니,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키는 이마에 손을 얹고 『그냥 집에나 갈걸.』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사람이 적은 골목을 찾았다.



덜컹ㅡ


자판기에서 나온 토마토주스를 벌컥벌컥 들이키자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온 것 같았다.


벽에 기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골목 사이의 좁고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단 하나의 별이 외롭게 빛나고 있었다.

별은 강하게 빛나지 않았다. 별에서는 언제 꺼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작고 흐린 빛이 새어나왔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혼자 흐릿하게 빛을 내는 별.


나랑 닮았어.


주머니에서 담배를 반쯤 꺼내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담배연기를 내뿜으면, 저 별이 연기에 묻혀 영원히 사라져버릴것만 같았다.


남은 주스를 마저 들이켜고 빈 병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하아ㅡ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후우ㅡ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붸에에...?」

「니콧..?」


자판기 옆 건너편에서 들린 건,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당혹감에 고개를 내밀자 반대편의 사람도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보다 조금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어린아이같이 똘망똘망한 붉은 눈동자, 좀 더 길어진 트윈 테일..

이제는 조금 더 작게 느껴지는 아담한 키.


니코였다.


「마키... 잖아? 여긴 어떻게....」


「....」


「잠깐- 거기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외출할 용도로 신은 슬리퍼가 바닥에 질질 끌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왜? 라고 이유를 생각할 새도 없이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본능이 니코와 마주치기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ㅡ」


「아, 혼자가도 괜찮아요.」


「오늘 정말 수고하셨어요!」


스륵- 탁.


니코는 어지러운 취기가 올라오자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스태프들과의 뒤풀이라 어쩔 수 없이 낀 자리.


가뜩이나 약한 술을 평소 주량을 한참 넘어서 마셔버렸다.

앞으로의 성공을 기원한다느니 하는 구실로 도수가 높은 술을 마셨더니 얼굴이 후끈거렸다.


성인이 된지 한참 지났어도 그녀에게 술은 영 맞지 않았다.

술자리의 주인공이 자신이었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지만.



「후후ㅡ 오늘 라이브는 진짜 대 성공이었지!」


지금까지 겪었던 공연장 중 가장 큰 규모에, 며칠 뒤엔 시청률이 꽤 나오는 케이블tv에 편집 본까지 방송된다고 했다.

가족들과 tv를 보며 우쭐해할 것을 상상하니 만화에 나오는 악당이 지을법한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 라이브는 4월쯤이랬지?」


규모는 좀 작지만,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겠어!


「그나저나 이건 누구한테 줄까ㅡ」


매니저가 '부를 지인이 있으면 드리세요'라며 건네준 다음 라이브의 최전열 티켓.


두 장, 세장도 아니고 단 한 장이라니. 이래선 가족들한테 주기도 애매하잖아.

매니저한테 따지면 몇 장 정도야 더 받아낼 수 있겠지만, 가족이 다 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명, 한명....

친구들의 얼굴이 한명씩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일본을 떠나있는 에리와 코토리, 호노카는 당연히 무리일 테고, 우미는 도장 때문에 바쁠 텐데..

남은 건 린, 하나요, 노조미 정도인가ㅡ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가장 친밀하게 지내는 건 뮤즈의 멤버들.

뮤즈로 활동하며 보낸 고등학교의 3학년은 어릴 때부터 바랐던 아이돌이라는 꿈이 이루어지게 해준 일등공신이었다.


문득 마키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밀한 관계였던 마키가, 그때를 기점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니코 쪽에서 가끔 전화를 걸어봐도 돌아오는 건 발신거부를 안내하는 음성 뿐.


「그 이후론 연락도 안 받고. 대체 뭐하고 지내는 거야..」


『나 있지.. 니코를ㅡ』


무슨 기억을 떠올리는 거야!

잡념이 떨어져나갈만큼 고개를 세게 흔들자 현기증이 올라왔다.


「우읍...욱..」


이게 무슨 꼴이람.

내가 미안해할 게 뭐 있어? 연락을 안 받는 건 그쪽인데.


「어...?」


저 멀리서 붉은색의 웨이브 헤어를 한 여성이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었다.

니코보다 한 뼘이나 큰 여성의 키는, 그 여성보다 두 뼘정도 큰 남자와 무척 잘 어울렸다.


「마키!」


휙-


「아, 죄, 죄송합니다..」


반가움에 어깨를 붙잡았더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어서, 몇 번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기, 저 사람 야자와 니코 아니야?」

「에ㅡ? 설마...」


누군가의 수군거림에서 시작한 소음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뒤늦게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지 않았다는걸 깨달았다.


술에 취해서인지 프로아이돌 답지 못한 행동을 해버렸다.


니코는 마스크를 꺼내 뒤집어쓰고 골목을 향해 미끄러지듯 사람들의 틈을 빠져나왔다.


-


후미진 골목에 들어서니 중심가 주변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니코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마스크를 벗었다.


근처의 빨간색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아 뚜껑을 따자 쉬익ㅡ하고 경쾌한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자판기 옆에 등을 기대 달콤한 탄산을 들이키자 속 안에서 짜릿한 기운이 올라왔다.


「후우ㅡ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하아ㅡ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니콧..?」

「붸에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자판기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마셨던 술이 단번에 깰 정도로 놀라서, 손에 든 음료수 캔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할 정도였다.


『방금 전처럼 착각한거겠지. 설마..』


자판기의 건너편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자 반대편에서도 붉은 머리카락이 슬금슬금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점점 고개를 내밀더니, 보랏빛 눈을 드러냈다.

그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수 년간 보지 않았음에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마키.


「마키...잖아? 여긴 어떻게..」


「....」


「잠깐- 거기서!!」


마키는 아무말없이 뒤돌더니, 전력으로 달려가버렸다.

따라가려 했지만 취한 상태인데다가 구두차림이라 뛰어가는 건 무리였다.


「마키..」



-


거칠어졌던 호흡이 진정되자, 마키는 방금전의 일이 너무나도 창피하게 느껴져 길에 보이는 돌맹이를 확 차냈다.


「바보... 바보, 바보!」


「이래선 내가 뭐 잘못이라도 한 것 같잖아! 니코가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방금 마주쳤던 니코의 얼굴, 급하게 도망치느라 잠깐밖에 보지 못했지만 예전의 앳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왼쪽 귀에 걸린 은색 귀걸이와 조금 진한 립스틱, 살짝 길어져 어깨밑으로 내려오는 트윈테일을 빼면 예전과 똑같다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화장해도 전혀 어른처럼 안 보이거든? 흥.」


누가 듣지 못할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자취방에 도착한 후에야, 먹을거리를 사러 밖에 나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니 식욕이 싹 가셔서 뭘 먹고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갔다가 니코와 또다시 마주친다면, 이번엔 다리가 부들부들떨려서 도망치지도 못할것같았다.


왜 니코를 마주할 수 없는걸까?

그때의 일 때문에?


아니, 겨우 그 정도 일 때문에 사이가 갈라질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가 미적지근하지는 않았다.

방금전 니코의 표정에서 놀라움과 동시에 반가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준비가 되지 않은 건, 니코가 아니라 나라는 말... 이 되는거네.」


머릿속이 구겨진 악보처럼 뒤섞이고 꼬인 채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쓰니까 허기가 찾아와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를 구석구석 뒤졌다.

사놓고 먹지 않아 시들어버린 과일 몇 개와 유통기한이 지난 인스턴트 식품들 틈에서 먹다 남긴 프레첼을 찾을 수 있었다.


'토마토케첩향'이라고 적힌 포장지를 거칠게 뜯어내, 눅눅하고 차가운 과자를 한움큼 꺼내 입안에 쑤셔넣었다.



『먹을거로 스트레스 푸는 건 아이돌한테 독인 거 알지?』


잠시나마 잊었다고 생각했더니, 다시 니코가 머릿속에 찾아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왜 아직도 날 괴롭히는건데!」


벌써 5년도 더 넘게 지난 일이었다.

그 이후 니코와 함께한 순간보다 그렇지않은 순간이 훨씬 더 길었으며,

니코에게 품었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은 이미 예전에 불씨가 사그라들듯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니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마키는 프레첼을 냉장고에 다시 집어넣었다. 유통기한을 고려해 눈에 잘 띄는 곳으로.

이에 낀 과자부스러기가 신경쓰여 양치질까지 끝내고 보니 시간은 벌써 열 두시를 넘기고있었다.


「오늘 밤에도 공부해야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마키는 이불에 누워 베개를껴안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오늘은 공부할 기운도 없고, 기분도 영 아니었다.


그때였다.


위잉-하고, 책상위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린 건.

끊어지지않고 계속 울려대는 진동이 문자가아닌 전화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시간에 누구야?」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차고 핸드폰을 덥썩 잡아채 화면을 본 순간,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니코쨩』이라는 세 글자가 핸드폰 화면에 표시됐다.

'니코' 라고 저장해두기엔 너무 딱딱하게느껴져 덧붙였던 '쨩'이라는 호칭.


몇번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은 이후로, 니코가 전화를 걸어온 건 수년만의 일.

분명 아까 전의 만남이 이유일 것이다.


도망친 직후에 바로 전화하지 않았다는 건, 니코쪽에서도 망설임 끝에 전화를 건 게 분명했다.


마키는 통화 수락버튼에 손가락을 뻗다가 잠시 주춤했다.



이 전화를 받으면, 뭐라고 말해야하지?

내가 왜 도망쳤는지, 지금까지 연락을 받지도 하지도않은 이유가 뭔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어질 대화 주제를 생각하니 오히려 전화를 안받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니코에게는 더욱,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초라한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니코에게만은...


「아... 끊어졌네.」


마키는 문득, 자기가 그 미성숙했던시기에서 조금도 발전한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식의 양도 훨씬 늘었고, 키도 가슴도 그때에 비해 더 커졌지만.

아직도 어린애에서 몇 발자국 벗어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눕는다고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아 tv를 켰다.

이곳저곳으로 채널을 옮겼지만 딱히 흥미가 가는 채널은 없었다.

심야 방송은 대부분 재방송인데다가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위주의 구성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슬슬 tv를 끄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 때쯤, 시선을 잡아끌만한 채널이 나타났다.


아이돌 가수의 라이브를 위주로 방송하는 채널. 몇달 전의 인기 라이브를 재방송해주는 것 같았다.

잠자코 노래를 듣다보니 자주 가는 편의점에서 흘러나오는 곡도 있어서, 가수들을 좀더 눈여겨 보게 되었다.


꽤 많은 팀이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자, 호기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저중에 니코도 있을까?


라이브 방송을 챙겨보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잡지나 tv에서 종종 봤기에, 니코가 프로 아이돌로 데뷔한 건 알고 있었다.


어느정도 인지도도 있어보였으니 이런 방송이라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자기도모르게 어느새 니코가 방송에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전보다 더 많은 가수들이 화면 속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이젠 다른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관심 밖의 일.


하지만 니코는 마지막무대가 끝날때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알게모르게 실망하는 자신이 답답하게느껴졌다.


왜 내가 실망해야하는거야.

니코 따위한테!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피를 신경질적으로 꺼내 입에 물었다.

창문을 열고 불을 붙이려했더니 이번엔 라이터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편의점 갈까.」


꺼지지않은 TV에선 MC를 맡은 사람들이 잡담을 나누며 분위기를 풀었다.


『이번 순서는 메인 무대를 장식해주신 야자와 니코양의 인터뷰도 빠질 수 없죠!』


...니코가 메인 무대를?


이름을 잘못 들었나싶어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방금전 만났던 그 니코가 화면에 그대로 비춰지고있었다.

니코의 무대를 보지 못했던 건, 아마 첫번째 차례로 공연했기 때문이라는 막연한 추측과 함께, 니코의 입에서 나올 말에 집중했다.



『니코니코니~ 안녕하세요 야자와 니코입니다! 오늘 관객여러분들덕에 저도 신나게 노래불렀어요!』


『좋아하는 취미요? 조금 부끄럽지만 아이돌 방송 보는걸 좋아해요ㅡ』


...

내가 아는 니코가 맞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니코는 방송관계자의 질문에 능숙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다.


『가수가 된 이유ㅡ 음... 전 어릴때부터 아이돌이 돼서 모두에게 미소를 주고싶었답니다. 니콧!』


『고등학교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응원해준 친구들 덕이 커요. 함께 스쿨아이돌활동도 했거든요.

   언제한번 관객여러분들한테도 소개시켜주고 싶습니다. 네? 뮤즈는 다들 알고계신다구요? 아하하ㅡ』


신경질적으로 전원버튼을 눌러 tv를 껐다.


니코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줄은 몰랐다. 수년도 더 전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ㅡ 누구보다도 빛이났던 아홉 개의 별.



뒤쳐진다는 열등감이 생긴 후부터는 뮤즈의 멤버들과 잘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의 추억은 가끔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혼자 맥주를 들이키면서 떠올리는 것으로 끝이었다.


뮤즈.


다들 현실에 치여 살며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뮤즈'라는 이름.

니코도, 다른 관객들도 기억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니코가 뮤즈로서의 마키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있다는걸 의미했다.


마키는 핸드폰을 쳐다봤다.

지금 전화하면, 받을까?


...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


『...』


『여보세요?』


이대로 끊어져버릴것만 같던 송신음이 사라지고, 목소리가 찾아왔다.


「....오랜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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