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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장편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完-

그날 내리던 비가 그치지 않은 것처럼, 거무스름한 구름이 가린 하늘은 여전히 빗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젖은 풀냄새, 떨어지는 빗물이 바닥에 고인 웅덩이와 부딪히며 투둑거리는 소리.



에리를 떠나보낸다.


아니, 에리가 내 곁을 떠나간 건 한참 전의 일.

에리는 이미 날개의 깃털을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날아가버렸다.


에리와 지낸 시간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행복함을 느꼈다.

소중한 추억들과 수없이 많은 감정을 마음속에 새겼다.



『아야세 에리』

돌에 새겨진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자,

거친 숨을 쉬며 생기를 잃어가는 차가운 에리의 몸의 감촉과, 에리를 껴안고 눈물 흘렸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이젠 에리를 볼 수 없다.

사진과 영상,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져가는 기억으로만 되새길 수 있는, 사라져버린 사람.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속 어딘가가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든다.



모두 같이 봤던 로맨스영화에서 등장한 여자 주인공의 대사가 떠올랐다.


사람에게 행복한 사랑의 순간은 너무나 짧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그 짧은 순간을 가슴에 새긴 채 함께 걸어가는것이 연인이라고.

그 말에 대한 남자 주인공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애초에 영화도 조금만 보다가 잠들어버렸으니까..



길게 이어진 장례식의 절차도 어느덧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비는 여전히 그칠 기세 없이 어깨와 양말에 조금씩 스며들어온다.



차가워.

추워.

...외로워.


「웃... 우윽ㅡ... 에리쨩..」


입에서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신음 소리도,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도 비가 가려주기를 바랐다.



『에리를 저렇게 만든 원인은 나에게 있다』그런 죄책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날 위로해주려는 모두에게 거리를 벌렸다.

도움을 멀리한 채 나 혼자 깊고 깊은 늪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빛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불을 껴안고 혼자 잠이 들 때마다 꿈에서 에리가 나타났다.

에리는 날 찾고 있었다. 병실의 침대에서 끊임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에리가 원망 섞인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어올때마다 땀에 흠뻑 젖어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장례식에 찾아온 건, 단지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손가락질 받으며 미움 받는다면 마음 한편이 후련해질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



하지만 현실은 예상과 달랐다.

내 생각을 꾸짖기라도 하듯,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안아주며 상처를 보듬어주려 애썼다.

내 심정이 어떤지 조금도 모르면서, 전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차라리 나를 욕했더라면, 모든 게 내 탓이라고 말해줬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텐데.





끝까지 자리를 지킬 것같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리사에게도 말을 걸어보려다가, 막상 눈이 마주치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차가운 눈총을 받은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에, 아무 말도 못한 채 시선을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멀어져가는 아리사의 뒷모습이 에리와 겹쳐보여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비가 조금은 잠잠해지고, 침묵이 짙게 깔린 묘지.


결국 이곳에 남은 건 나와 노조미, 차가운 돌 밑에서 잠들어있을 에리뿐.


노조미는 장례식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두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에리가 잠들어 있는 묘비를 바라보기만 했다.


「노조미쨩.」


「...」


목 끝에서 겨우겨우 꺼낸 부름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노조미는 고개를 돌려 건조한 눈동자로 나를 힐끔 흘겨보았다.


바늘처럼 뾰족하게 다듬어진 시선에 속마음이 실려 내게로 쏘아진다.



『네 탓이야』하고, 질책하는 눈.



「내가 밉지 않아?」


빗소리에 겨우 파묻히지 않을 정도로, 작은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기가.」


「알고 있잖아...!」


노조미는 천천히 일어나서 날 노려봤다.

조금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냥... 그냥, 에리치는 힘들었던 거래이.

   앞으로 나아갈 자신이 없었던 것뿐이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날 배려해주지 않아도 된다구?

   왜 아무도, 전부 내 탓이라고... 탓하지 않는 거야!」


「호노카.」


노조미는 오래 앉아있던 탓인지 몇 번이나 넘어질듯 휘청대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아 걸어왔다.


마주서보니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예쁘게 땋은 양갈래 머리와 대학생느낌이 물씬 풍기는 캐주얼한 옷을 걸쳐 입었던 그때와 달리,

풀어헤쳐져 이리저리 흔들리는 머리칼과 검은색 옷..


코앞으로 다가온 노조미가 내게로 손을 뻗었다.

눈을 감고 뺨에 아픔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날 때려줘. 제발... 그래서 마음이 풀린다면 몇 번이고 맞아도 괜찮으니까.』


...


화끈한 아픔 대신, 볼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노조미쨩, 어째서..」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마.」


노조미는 손등으로 내 볼을 쓰다듬고는 뒤돌아섰다.


흔해빠진 변명, 사과와 위로를 떠올리던 겁쟁이 같은 나에게,

노조미의 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마음 한 구석을 찔러 들어왔다.



「니가 에리치의 연인이라면, 그러면 안되는 기다.

   호노카는 조금도 성숙해지지 않았네.」


「...」


노조미는 대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우산도 내팽개친 채 빗물을 왕창 뒤집어쓰고 비틀거리는 노조미의 뒷모습은, 누구보다도 작아 보였다.


붙잡을 수 없었다.



-



『언제나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언제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호노카. 닮았잖아?』


일 년도 더 전에 에리가 고백할 때 했던 말. 잊으려 하면 할수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바보 같은 해바라기.」


반쯤 저물어 빛을 잃어가는 태양을 향해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태양을 바라보느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는 것도 모르는.

해가 지고 난 후에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바보 같은 꽃.



-



「높네.」


병원 옥상의 난간 너머로 에리가 떨어진 곳을 내려다보자 현기증이 솟아올랐다.

그 선택을 하기까지 몇 번이나 망설였을까, 에리는.


「에리쨩을 바라보면서 살고 싶었어.」


바라볼 태양이 사라져버려, 해바라기는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다.

빛이 없는 어둠속에서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인채로, 천천히 죽어갈 지도 모른다.


에리가 보고 싶다.

에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감사를 전하고 싶다.

나랑 함께해줘서.. 고맙다고.



옥상 난간은 그리 높지 않았다. 간신히 허리에 닿을 정도의 높이.

몸을 조금만 숙이면, 에리에게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볍게 담을 넘는다는 느낌으로, 난간위에 한쪽 발을 얹었다.

생각보다 무섭진 않았다. 에리가 했던걸, 내가 그대로 따라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도 에리쨩에게ㅡ」



쿵.


「아야...」


누군가 내 목덜미를 잡아끄는 바람에 옥상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파! 대체 누구」


「여기서 뭐하는 거야?」


「...마키쨩?」


팔짱을 낀 채 내뱉는 냉정한 말투와 함께, 방금까지 달린 것처럼 거친 호흡이 느껴졌다.


「파파를 보러왔다가 우연히 뒷모습이 보여서 쫓아왔더니,

  밑으로 뛰어내리려해서 깜짝 놀래키질 않나, 그러다가 갑자기 뒤로 자빠지는 건 또 뭐야!」


「그건 마키쨩이 뒤에서」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설마 뛰어내릴 생각은 아니지? 며칠 동안 학교도 안나오고 내린결정이.. 고작, 고작 이거야?」


「아니야! 단지...」


「단지 뭐?」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마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로 현실에서 눈을 돌리겠다고? 피하고 도망치면 뭐든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거야?

   결국.. 에리처럼 주변 사람들을 힘겹고 슬프게 만든다는 걸 왜 모르는 건데!」


「에리쨩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화낼 거야.」


내 쏘아붙임에 마키도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스스로 한 말의 의미가, 과한지 아닌지 모르는 바보는 아니었다.


「...미안. 난 그저ㅡ」


「마키쨩은 에리쨩이 병실에서 얼마나 힘들어 했을지 알아...?

  에리쨩에게 꿈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 꿈을 이룰 수 없게 된 에리쨩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아냐고!」


「그런 말 하는 호노카는 알아?」


「...!」


「우리만 몰랐어.. 노조미도 아리사도, 병실에 가끔 들렀던 파파도 알았는데,

   우린 라이브 연습을 한답시고 에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다고...」


「...」


「호노카. 이제와서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 없다는 건 알아. 그치만...」


마키의 목소리가 엷게 펼쳐진 구름처럼 흐려졌다.

이른 새벽 풀잎 끝에 맺혔던 이슬이  약한 바람에 떨어지듯, 톡하고 건드리면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친구가 사라지는 건 싫으니까...」


어깨를 들썩이며 낮은 신음소리를 흘리는 마키에게 다가갔다.


「마키쨩 미안해..」



바닥에 주저앉은 마키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여주었다.

위로받기 만하던 내가 누군가를 위로해준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 결심을 하나 세웠다.

에리가 누구보다도 강하게 원했던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작은 결심.



-



10월 12일.

에리가 내 곁을 떠난 지 한 달 하고도 며칠이 더 지났다.


에리에겐 단 한 번도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죄책감에 짓눌려 숨이 막힐 것 같은 감각은 한 번으로 족했다.

아리사와 노조미, 모두를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마키와는 그 후로 종종 통화하거나 하지만, 딱 그 정도.

난 더 이상 다가가려 하지 않았고, 마키 또한 내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주려는 것 같았다.



스쿨아이돌 활동도 반쯤 그만두다시피 했다.


해체를 정식으로 선언하진 않았다.

단지, 나를 포함한 모두가 웃으며 노래 부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모두에게 꿈을 나누어주는 스쿨아이돌, 누구보다도 빛나는 존재.


『내가 다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하는 스스로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노트북을 펼쳐 인터넷 창을 띄우자, 지금까지 열어보지 않은 수백 개의 이메일이 화면에 표시됐다.


뮤즈를 해체한 뒤에도 에리를 기억해준 사람들.

에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메시지.


하지만 날짜가 최근에 가까워질수록 에리에 관한 메일은 눈에 띄게 줄어갔다.

그 대신, 스쿨아이돌 활동을 다시 시작해달라는 응원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에리를 잊어간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에리가 점점 사라져간다.


그 사실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도 언젠가는, 에리를 추억속의 작은 존재로 기억해버리는게 아닐까.

바라고 퇴색되어버린 에리의 기억을.. 점점 잊어간다면, 난 정말로...


「응?」



『호노카씨.』


수많은 메일들 중 가장 짧은 제목의 메일, 보낸 사람은... 익명?

일주일도 더 전에 보내진 메일이었다.


『10월 12일 일요일 오후2시까지 칸다묘진의 계단 앞으로 와주세요.

   전해드릴 말이 있어요. 편지도.』라는, 용건만 담긴 짧은 내용.



「누구야? 이런 메일을 보낸 사람은.」


다른 메일들을 주욱 둘러봐도, 눈에 띄는 메일은 딱히 없었다.

괜히 짜증나서 노트북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10월 12일... 2시.」


오늘이잖아?


고개를 돌려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12시 30분. 달려간다면 충분히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다.


갈까, 말까.


시계바늘소리가 틱, 틱, 소리를 낼 때마다 고민도 점점 커졌다.



문득 책상위의 초콜릿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먹어대도 일주일은 걸릴 만큼 많은 초콜릿이 들어있는 상자.


얼마 전 하늘색에 물방울무늬가 총총 박힌 플라스틱 포장을 보자마자, 에리가 떠올라 무심코 사왔다.


「이 초콜릿 안에 아몬드가 들어 있으면 가는 거야.」


뚜껑을 열고 눈을 감은 채로 초콜릿하나를 대충 집어 들었다.


아몬드가 들어있는 초콜릿과 일반 초콜릿이 섞여있으니 절반의 확률.

여름의 더위를 견디지 못해 반쯤 녹은 초콜릿이 특유의 향기를 뿜어냈다.


입에 넣고 한번 씹자, 초콜릿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들어있네.」


에리가 가지 말라고 충고하는 걸지도.


낮잠을 자기위해 침대에 다시 누워 다리를 뻗었다.


...


...


「역시 가야겠어.」


옷장에서 눈에 띄는 대로 아무 옷이나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



「...아무도 없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다.

무려 일요일 피크타임의 칸다묘진이니까, 관광을 온 외국인이나 참배를 하러 온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누가 내 얼굴을 알아볼까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낀 채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이메일은 그냥 장난일 뿐이었을까.



위를 향해 길게 뻗어진 칸다묘진의 계단을 하나씩 밟아갔다.


『내가 이기면 러브라이브에 출전하는 거야!』하고 억지부리던 니코가,

트레이닝을 위해 우미, 코토리와 함께 수십 번 오르내리던 그때가,

전국의 스쿨아이돌과 노래하기로 결심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추억 하나하나가 내 안에서 살아간다.



「호노카씨.」


「아리사쨩...?」



아리사는 계단위쪽에서 나와 눈을 마주치고 멋쩍게 미소 지었다.


「메일, 봐주셨군요.」


저번과 다른 눈빛.



-



「저기, 아리사쨩... 미안해.」


아리사와의 재회 이후, 근처의 공원 벤치에 도착해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전에 만났을 때 말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해 버렸네.」



「호노카씨.」


「응?」


「저에게 사과하는 거로, 만족하세요?」


「...」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호노카씨를 기다렸어요. 언니의 묘에서.

   하지만 호노카씨는 장례식이후로 단 한 번도 언니를 찾아와주지 않았죠.」


「...미안.」


「알아요. 호노카씨가 언니를 찾아가지 않은 이유. 저만큼, 어쩌면 저보다 더 힘들다는걸.」


아리사는 말을 멈추고는 멀리서 손을 잡고 걷는 커플을 쳐다봤다.

잘 어울리는 남녀 한 쌍, 누구보다도 행복하다는 듯이 장난을 주고받으며 웃는 커플.



「언니가 제게 종종 해주던 말이 있어요.

   호노카씨는 너무 단순해서, 앞만 보고 달려간다고.」


「에리쨩이 아리사쨩한테 그렇게 말했어?」


내 물음에 아리사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기 때문에 호노카씨가 좋다고도 말했어요.」


「...」


「언니는 호노카씨 덕에 정말, 정말로 행복해 했어요.

   그날, 호노카씨에게 줄 케이크와 선물을 같이 고르던 때까지만 해도.」


「아리사쨩, 난... 에리쨩에게ㅡ」


아리사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종이봉투를 꺼냈다.


「전 그때까지만 해도, 호노카씨가 정말 원망스러웠어요.

언니를 그렇게 만든 원인이 호노카씨라는 생각에... 피해버렸어요.」


「언니가 호노카씨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편지에요. 늦게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리사가 내 손을 잡고 편지를 꼭 쥐어주었다.

에리와 똑 닮은 하늘빛 눈동자. 조약돌을 던진 연못처럼 일렁이는 커다란 눈.


내가 착각했었는지도 모르겠네. 노조미도, 마키도, 아리사까지.


나보다 더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손가락으로 아리사의 눈썹을 어루만지자 물기가 묻어나왔다.


「아리사쨩. 그렇게 속마음을 말해줘서 고마워. 사과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언니는 지금도 호노카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어느새 내 곁에서 슬쩍 떨어져 치마를 툭툭 터는 아리사.

언제 눈물을 글썽였냐는 듯 차분한 표정과, 그와 반대되는 조금 어설픈 동작.

고작 몇 개월 만에 만나는 건데도, 눈에 띄게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에리가 겹쳐 보일 만큼.


「아마 노조미씨도 그곳에 있을거에요. 매일같이 찾아오니까..

   그 봉투 안에, 언니가 노조미씨에게 쓴 편지도 들어있어요. 호노카씨가 전해주는게 좋을 거라 생각해요.」


아리사가 등을 돌리고 조금씩 내게서 멀어질수록 기분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저기... 아리사쨩...!」


「...」


「날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노조미쨩도, 에리...쨩도.」


「늦지 않았을거에요. 하지만, 망설이는 동안 늦어버릴 수도 있어요.」


의미를 알아듣기 조금 어려운 대답을 마지막으로, 아리사는 공원을 떠났다.



아리사를 보낸 후 혼자 벤치에 앉아 아까의 커플을 다시 바라보며,

잊을 수 없는 에리의 손과 그 손의 온기를 떠올렸다.


에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저 사람들처럼 손을 잡고 하염없이 걷고 싶어.

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



아리사는 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에리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지금까지 피해왔다.


나도 알고 있어.

언제까지 피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걸.



시선이 내 오른손에 들린 봉투로 옮겨졌다.

에리가 내게 남긴 말은 무엇이었을까.


봉투의 끝을 살짝 뜯어내자 찌익-하고, 밀봉된 부분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호노카는 조금도 성숙해지지 않았네』


『노조미씨도 그곳에 있을거에요』



「...노조미쨩.」


...


편지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


비가 내리지 않는 묘지는 뭔가 쓸쓸했다.


가끔씩 찾아오는 누군가만을 위한 장소.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적은 곳.

고독한 기분이 가득차고 또 가득차서, 내 마음이 짓눌려버릴 것만 같아.


「습, 하ㅡ」


공기를 최대한 빨아들이자 몸이 조금 시원해진 느낌이 들었다.

외로운 기분이 가시지 않는 건, 묘지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지도..



하늘에서 비를 쏟아내던 먹구름들도 잠시 쉬려는 듯, 몸에 잔뜩 비를 머금은 채로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저녁이 다가오기시작하자 날씨는 더 추워졌다.


숨을 뱉어내도 김은 생기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추워도 여름이잖아ㅡ』하는 생각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손으로 양 어깨를 감싸니 추위도 조금 덜해진 것 같았다.


장소가 잘 기억나지 않아서 무작정 한발씩 내딛다가, 실수로 풀을 밟자 맺혀있던 물이 다리까지 약하게 튀어올랐다.

비 오는 날 웅덩이를 밟듯 일부러 풀을 밟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눈에 익은 장소가 나타났다.



아리사의 말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노조미, 에리도.



「노조미쨩.」


「...」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또 바보 같은 소리 하려고 왔나?」


「아니ㅡ 전해줄 게 있어서.. 자!」



『노조미에게, 에리가.』라는 글씨가 구석에 작게 적힌 하늘색 종이를 건네자, 노조미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걸 왜...」


「아리사쨩이 전해달라고 했어.」


「내한테 직접 주면 됐는데.. 아리사쨩도 참.」


「그리고ㅡ」


「그리고?」


「그거 말고도, 저번에 못한 말도 하려고.」



「고마워. 노조미쨩.」


「...또 '미안해'라던가 '내탓이야'같은 말, 할 줄 알았는데. 안하는 기가?」


「으응ㅡ 이 말이면 충분해.」


「그래, 그래.」


노조미는 장례식을 치뤘던 그때처럼 천천히 일어났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편지 고맙데이.」


들꽃처럼 미소 지어진 노조미의 눈꼬리에, 방금 밟았던 풀들처럼 작은 이슬이 맺혀있었다.


「에리치를 부탁하께. 내는 에리치한테 아무것도 못 해줬으니까,

   호노카가... 해줘야 한데이.」


「...응.」


또 보자는 간단한 인사와, 짧게 대답하는 나.


조금씩 떨리는 노조미의 등 뒤를 감싸주려다가, 그냥 보내기로 했다.

보랏빛 머릿결은 더 이상 푸석하지도 휘청거리지도 않았으니까.


아무도 없는 작은 섬을 둘러싸다가 이윽고 떠나버리는 바다의 파도처럼,

에리를 지금까지 지키던 노조미는 나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꽤 긴 시간이 지나서야, 에리와 단 둘이 마주하게 되었다.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


「에리쨩. 늦어서 미안해.」


「...무서웠던 것 같아.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어.

   꺾이고 부러지는 에리쨩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뭐라도 해보자고 생각했어.」


「가장 중요한건 에리쨩의 마음이었는데..」


전에도 한번 보았던 묘비에 적힌 에리의 이름을 손으로 더듬었다.

『아야세 에리』손끝을 타고 글자의 굴곡이 느껴졌다.


매끈한 회색 돌을 어루만진 손이 차갑다.

에리의 따듯함은 아마 다시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더 외로워진 기분이 든다.


물론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마주하기 싫어 마음 구석으로 미뤄두었던 사실.



그날 에리의 표정만큼이나, 딱딱하게 식어버린 묘비에 에리의 얼굴이 비쳐졌다.

에리가 겪었던, 사라지는 것을 선택할 만큼 지독한 외로움이 내게도...


「좋아해!!」


지나가던 누군가가 들으면 화들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온힘을 다해.

잠깐이지만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듯 바람도 풀도 움직임을 멈춰버린 것 같았다.


「지금도... 여전히..」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래. 에리쨩이 말했던 것처럼, 난 말보다는 행동이니까.

   행동으로 보여줄 거야. 매일, 매일 찾아오고, 말도 걸면서...」


「아, 맞다.」


문득 주머니에 있던 편지가 떠올랐다.

에리와 함께 읽는 게 좋겠다 싶어 묘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편지를 활짝 펼쳐내자마자 눈에 보이는 건, 편지 곳곳에 떨어져 번져진 에리의 눈물 자국이었다.

손으로 어루만지자 빳빳하고 거친 질감이 느껴졌다.

에리가 쓰면서 떨어트렸을 마지막 눈물.


「이건.. 꽃?」


조금 시들어있는 하늘색 꽃잎을 가진 꽃.

분명 익숙한 꽃인데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 물망초...」


에리가 고백할 때 말했던 그 꽃.

속에서 뭔가가 왈칵ㅡ 하고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아서, 눈을 감고 진정하려 애썼다.


진정하자, 진정.


억지로 팔을 꼬집고 고개를 휙휙 저었다.

에리의 앞에서 울 수는 없다. 그러려고 찾아온 게 아니니까.



『호노카.』


편지에 적힌 내 이름 뒤로, 두어줄 정도의 글이 볼펜으로 지저분하게 지워져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면 호노카가 이곳으로 찾아와줄텐데.

   나도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호노카를 눈앞에서 마주할 자신이 없는 걸지도.』


『호노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이 편지를 쓰레기통이 아닌 곳에서 읽고 있다면 난 아마ㅡ』


『이 세상에서 없겠지.』


『부모님, 할머니, 아리사... 지금 이 순간에도 모두의 얼굴이 떠오르지만ㅡ 가장 걱정되는 건 호노카와 노조미네.

   내 이런 선택이 분명 모두에게 큰 상처를 입힐 거라 생각해서, 어떻게 해야될지 한참 고민해봤거든.

   고민한 결과가 이거. 두 사람에게 편지를 남기는 거야.』


『사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땐 할말이 잔뜩 있었는데, 막상 적기 시작하려니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모르겠어.

   진심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건, 역시 호노카 쪽이 강한 부분인데 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만 짧게 쓰려고.』



『호노카.』


두 번째로 적힌 내 이름. 비뚤게 써진 글씨에서 에리의 손 떨림이 느껴졌다.


『내가 고백했던 날 했던 이야기 기억해? 해바라기와 호노카가 닮았다는 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ㅡ 호노카는 해바라기와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 싶네.

   모두를 골고루 비추는 태양. 그게 좀 더 호노카다워.』


『나만의 태양을 가지려고 욕심을 부려서,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처럼 벌을 받게 된 걸지도.』


내가... 태양?

아니, 난...


『편지에 같이 넣어둔 건 물망초라는 꽃이야.

   호노카가 편지를 볼 때까지 시들지 않고 잘 있어줬으면 좋겠지만, 무리려나?』


『그날 호노카에게 고백하기 위해 그 꽃의 꽃말을 빌려 쓰기도 했어.

   기억나? 물망초의 꽃말. 진실 된 우정, 그리고ㅡ』


「...진실 된.. 사랑」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와 에리를 이어준 물망초의 꽃말..


『사실 물망초에는 그 두개 말고도 다른 꽃말들도 있어. 그중 하나는』


『'나를 잊지 말아줘'』


『호노카. 시간이 지나서 우리가 서로 느꼈던 감정이 무뎌진다 해도, 날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잊혀진 다는걸 생각하니까, 너무 쓸쓸해져서...

   지나친 욕심일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치만.. 호노카만은 날...』



『부탁해도 될까?』


편지의 내용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짧다면 짧은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어낸 순간, 멈췄던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슥-


「...!」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얹는 게 느껴졌다.

누구보다 따듯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손.


이 느낌, 이 손... 에리의 손이야.


「에리쨩?」


뒤돌아봤지만 등뒤에는 에리의 묘비가 있었다.

나와 에리 둘만이 있는 장소에서, 내 어깨를 감싸 안아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감싸 안아주었던 감각만이 어깨에 남은 채 조금씩 사라지고 있을 뿐...


어깨에 손을 얹고 에리의 손길이, 따스함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따스함은 일몰 전의 마지막 햇살처럼, 느낄 수 없는 곳으로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떠나버린거구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던 날 말려준 것도, 마키쨩이 아니었어...」


어느새 먹구름들이 자리를 비키고 그 틈으로 햇살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금방 울어버릴 것 같았는데, 잠깐의 따스함을 느끼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있지ㅡ 원래 에리쨩한테 들려주려고 다함께 연습한 노래가 있어.」


「나와 에리쨩, 노조미쨩, 뮤즈의 모두가 뮤즈로서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야.」


『아ㅡ 아ㅡ』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꽤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저 멀리 펼쳐진 바다의 색깔은 따스해서」


『싫다면 거절해도 좋아.』


「꿈에 그리던 그림 같아」


『지금 바로 대답해주지 않아도 좋아.』


「애절함에 시간을 되감아볼까ㅡ」


『호노카. 당신만을 바라봐도 될까요?』


「no... 우윽.. 훌쩍...」



눈에 빗물이 떨어졌다.

넘쳐나도록 고인 빗물은 이윽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가에는 계속해서 미소를 띄웠다.

에리 앞에서 찡그린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


「당신을ㅡ 잊지 않겠습니다...」


물망초의 잎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잡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자, 사라진 줄 알았던 바람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순간 시들었던 물망초가 에리의 눈웃음처럼 고고하게 피어난 건,

천사의 작은 기적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