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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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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 설명서 사용 설명서 우미(45)「... 그 다음에 말로 완료, 라고 말하면 적용됩니다. 제대로 듣고 있나요, 에리?」 어두운 방에 혼자 앉아 홀로그램 녹음기에 대고 말하는 저를 보면, 무서워 할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얼핏 보면 딱히 아무래도 상관없는, 새로 나오는 신형 기계들의 사용 설명서를 단지 읽을 뿐인 무의미한 행동, 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벌써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한 지 15년이 지났습니다. 기술에 발전에 따라, 새로운 기술들과 그 새로운 기술들을 탑재한 여러가지 유익한 도구들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실로 15년전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의 기술들이 나오고, 만약 15년 전의 사람이 시간여행을 해서 지금 깨어난다면, 사용법을 몰라 쩔쩔 맬 정도의 도구들입니다. 자동차들은 사람없이 돌아다..
조각 새 교실, 새 사람들, 새 학교. 나에겐 모두 의미없는 이야기였지만, 한가지만은 퍽 마음에 들었다. 여기 음악실에 피아노가 있었다는 것이다. -3일전- 잊혀질만도 했지만 계속 이유없이 꿈에서 나오는 그날의 기억. 2등이라는 작은 균열감. 의사가 되고싶었고, 아버지와 같은 입장이 되고싶었다. 누가봐도 인정할만할 멋진 사람이 되고싶었다. -마키가 벌써 말을 한다고? 대단하네. -마키가 벌써 글자를 쓴다고? 정말? -마키가 벌써... -피아노를 시작했다고? 알아서 잘하겠지. 그리고 그날, 2등이라고 적혀있는 작은 트로피를 보신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 작디작은 실망감이 지나갔었다. 퉁퉁부었던 눈을 작은 손으로 닦으며, 칭찬, 혹은 위로를 바랐던 작은 아이는 그 얼굴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니시키노 마키는 아..
달려가는 그 손을 붙잡아 “뭐, 무슨 소리야.” “에. 있는 그대로 말한건데, 혹시 못 알아들은건가? 헤어지자는 말이었는데-” 내 앞의 자그마한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갸우뚱거렸다. 마키쨩은 똑똑한데 이런건 의외로 바로 못알아듣네, 라면서. 나 역시 그녀가 어째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야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 특집의 생방송 오디션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그녀가 오랜만에 만나자며 겨울방학의 공부로 바쁜 일요일의 나를 불러내서는, 자주 다니던 카페의 지정석과 다름없는 창가 쪽 구석진 자리에 마주보고 앉아, 꽤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어갈 쯤에, 갑자기 저런 괴상한 문장을 내뱉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늘 그랬듯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오디션 준비로 ..
잊고 싶지 않았어, 끝까지 “저기, 언제까지 잘 생각이야?” 내가 눈을 뜬 장소는, 이미 졸업한 내가 있을 곳이 아닌 오토노키자카의 학생회실이었다.어떻게 된 일인지 나 혼자 온 것으로 기억나는 학생회실에, 있을리 없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항상 그랬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에게 조금 서툰 사투리로 말을 걸었다. “뭐야. 호노카가 ‘깜짝생일파티’ 하는걸 어젯 밤에 모르고 너한테 라인 보내버렸다며?” “아, 그래서 내가 모른 척할려구 학생회실에 숨어들어왔제. 근데 왜 니콧치가-” “그야! 학생회실을 꾸미러왔더니 본인이 들어와서 자고있었으니까야아아-!!” 니코는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아아악-하는 괴성을 질렀다.그런 거였구나. 나는 당연히 우리가 쓰던 부실을 꾸밀줄 알았다. 그도그럴게 항상 누군가의 생일 때면 어찌됬던간에 부실을..
조명이 꺼진 뒤에도, 가수는 음악을 꿈꾼다. 흐르는 멜로디를 따라 머리칼이 휘날린다. 가사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모두의 목소리와 어우러진다.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 그 땀마저 기분 좋게 느껴졌기에 닦아내지 않았다. 노래에 맞추어 저마다 가지각색의 형광봉을 들고 흔드는 관객들,들려오는 그들의 환호와 응원소리. 음악이 끝나자 스포트라이트가 꺼진다. 긴장 때문에 한꺼번에 숨을 몰아쉰다. 다음 무대가 열리기 직전의 짧은 순간.마음이 이어진 듯 모두와 눈이 마주치자 입가에 미소를 띤다. 지금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노조미쨩! 다음 노래가 이번 무대의 마지막이야.』 손을 내미는 호노카. 『뭘 멀뚱멀뚱하게 서있는 거야? 노조미.』 니코. 『…….』 뮤즈의 모두와 함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뮤즈의 세계ㅡ ... 「오랜만이네.」 「...!」 짤랑ㅡ ..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完- 그날 내리던 비가 그치지 않은 것처럼, 거무스름한 구름이 가린 하늘은 여전히 빗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젖은 풀냄새, 떨어지는 빗물이 바닥에 고인 웅덩이와 부딪히며 투둑거리는 소리. 에리를 떠나보낸다. 아니, 에리가 내 곁을 떠나간 건 한참 전의 일.에리는 이미 날개의 깃털을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날아가버렸다. 에리와 지낸 시간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행복함을 느꼈다.소중한 추억들과 수없이 많은 감정을 마음속에 새겼다. 『아야세 에리』돌에 새겨진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자,거친 숨을 쉬며 생기를 잃어가는 차가운 에리의 몸의 감촉과, 에리를 껴안고 눈물 흘렸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이젠 에리를 볼 수 없다.사진과 영상,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져가는 기억으로만 되새길 수 있는, 사라져버린 사람.그렇게 생..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4- 날개를 잃은 천사는 연인을 기다렸다. 연인은 천사를 찾아오지 않았다. 천사는 날개가 사라진 어깨를 더듬으며 연인이 찾아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연인이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연인은 천사를 찾아오지 않았다. 천사는 마음을 접고, 혼자 날아오를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천사는 날개가 없기에 날아오를 수 없다. ... 마침내 연인이 천사를 찾아왔을때, 연인은 천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 - 팡- 알록달록한 무지개 무늬 우산을 펼치고 호무라의 입구를 벗어난다. 몇 발자국 걷기가 무섭게 우산 위로 빗물이 쏟아져내리며 후두둑하고 소리를 낸다. 어제만 해도 다같이 옥상에서 연습할 수 있을만큼 맑은 날씨였는데-한여름의 날씨라는건 정말 변덕이 심하다. 우산이 미처 가리지 못한 부분으로 비가 ..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3- 「뭐!?」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마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많이 놀랐는지 마키 특유의 목소리가 옥상난간을 넘어 음악실까지 들릴 것 같았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로, 마키보다 더하면 더했지 침착한 사람은 없어보였다. 「호노카, 진심입니까?」 「응! 다함께 에리를 위한 라이브를 하자! 다른 관객은 부르지 않고, 에리만을 위한 무대를!」 이것이, 내가 생각해낸 해답이었다. 「전 반대합니다. 지금의 에리가 라이브를 본다고 해서 기운을 되찾는다는건 힘들거라 생각해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무모해 보이는 방법이니까, 반대라면 각오하고 있었다. 「무모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에리쨩을 위해서 라이브를 하고 싶어!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