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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장편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3-

「뭐!?」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마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많이 놀랐는지 마키 특유의 목소리가 옥상난간을 넘어 음악실까지 들릴 것 같았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로, 마키보다 더하면 더했지 침착한 사람은 없어보였다.



「호노카, 진심입니까?」


「응! 다함께 에리를 위한 라이브를 하자!

  다른 관객은 부르지 않고, 에리만을 위한 무대를!」


이것이, 내가 생각해낸 해답이었다.


「전 반대합니다. 지금의 에리가 라이브를 본다고 해서 기운을 되찾는다는건 힘들거라 생각해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무모해 보이는 방법이니까, 반대라면 각오하고 있었다.


「무모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에리쨩을 위해서 라이브를 하고 싶어!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해.」


모두와 눈을 마주치며 표정을 눈에 새겼다.

걱정과 망설임, 긍정과 부정이 뒤섞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와 눈이 마주친 하나요가, 조금 망설이는듯 하더니 손을 들었다.


「난 해보고 싶어.」


「정말.. 입니까?」



「병원에서 본 에리쨩은 너무 슬퍼보였어.

   활기를 되찾아 줄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던 해보는게 좋지 않을까?.」


「카요찡이 하겠다면, 린도 하겠다냐.」


「뭐 어쩔 수 없네- 호노카가 말한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것 같고.」


「마키까지.. 이런 방법이 좋은 효과를 볼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잖아요?」



「우미쨩. 하자!」


「코토리?」


「다같이 미리 정했잖아? 호노카쨩이 어떤 결정을 내리던지 그것에 따르기로.」


「...」


「하는 거야. 에리쨩을 위해서!」


「코토리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네요.」



「그런데 호노카, 곡은 어떻게 하실거죠?

   새로 만들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하기도 하고, 가사를 어떻게 써야할지..」


「역시 에리쨩과 함께 불렀던 노래로 하고싶어.

   내 생각에는 그 노래가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우미쨩, 귀 대봐.」



「.....! 괜찮겠어요? 그 노래에서 3학년의 파트가 빠지는 건..」


「에리쨩의 파트는 내가 부를게. 그리고 다른 파트는 다같이 부르는거야!

  멋지게 해내보여서, 꼭 기운 차리도록 해주자!」



-



저절로 눈이 뜨였다.

자다가 깨버렸는데도, 원래부터 깨어있던 것처럼 몸상태와 정신이 멀쩡했다.


누구나 잠이 깬 직후에 겪는 노곤한 잠기운 같은 것도 전혀 없어서,

병실의 흰색 커튼너머로 비치는 달빛이 아니었다면 아침이라해도 믿을 정도였다.



팔을 간지럽히는 보랏빛 머리칼을 손에 가득 담아냈다가, 손에 힘을 풀자 그대로 흘러내렸다.

간호인이 사용하는 간이침대에서 불편한 자세로 내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잠자는 소녀.


노조미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눈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더니 촉촉한 물기가 묻어나왔다.

좋은 꿈은 아니겠구나-



어제는 호노카가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호노카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 때문일까?


아마도 '찾아오지 마!'하고 말해버렸지-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오지 않는거야?'


섭섭함과 슬픈 감정이 뒤섞이다가, 순식간에 분노로 변하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추스린다.

호노카에게 이런 마음을 품으려 한다는 건, 사고를 겪기 전까진 상상도 못했던 일인데.


혼자 많은 생각을 할수록 부정적인 생각만이 가득 찬다.


변해가는 내가 무서워.


앞으로의 생활이라던가 미래의 꿈 같은 건,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머릿속의 한 구석에 쳐박아뒀다.



잠들어 있는 노조미의 손을 꼭 잡았다.


조금, 차갑다.



-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끝났다아-」


그대로 옥상 바닥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괜히 기분이 좋아 눈부신 태양에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모든게 잘 풀리는 느낌이야.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들 라이브를 하기로 결심하기 전보다, 눈에 띌만큼 활기를 되찾았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었다.


니코는 견습 아이돌을 하느라 바쁘고, 노조미는 학업이, 에리는 다리가 다쳤으니까..


아홉명이 함께 불렀던 곡을 여섯명이서 부르게 되자 빈자리가 엄청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보다도 더 노력했던 덕분일까.

어설프고 허전했던 라이브 연습에도 점점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3학년이 졸업한 이후 매너리즘이랄까, 아이돌활동을 이어가는것도 주춤거리기도 했었지만.

에리만을 위한 이번 라이브를 최고로 멋지게 해내기 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앞으로 이틀이네-」


에리.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에리를 꼭 미소짓게 만들어줄테니까!



「연습, 조금 더 할래?」


「호노카. 너무 무리하면 안좋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그치만..」


「호노카의 심정은 이해해요. 하지만 이제 조금있으면 에리에게 보여줘야 하니까, 컨디션을 관리하는게 더 중요합니다.」


「..알았어 우미쨩.」



나도 알고 있어. 알고는 있지만.

에리가 너무 보고싶다.


에리에게 깜짝 공연을 보여주고 싶어서, 겨우 일주일 정도지만 에리에게 병문안 가는 것을 참고있다.

하지만 벌써부터 에리의 얼굴을 본지 몇달이라도 된 것 같아서, 조바심이 가라앉지 않는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린은 '에리 금단현상'이라 놀려대지만, 보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내일 아침일찍 내가 에리쨩한테 말하러 갈게! 이틀후의 라이브에 대해서.」


「호노카 혼자 가는게 좋겠어. 너, 에리랑 며칠동안 얘기 못했잖아?」


「응! 고마워 마키쨩!」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에리도 기뻐해주겠지?



-



일주일.

아니, 보름 정도. 아니면 한달?


호노카가 찾아오지 않게 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다.


뮤즈와 함께하며 쉴틈없이 보냈던 1년보다도, 요 근래의 며칠이 훨씬 길다.

눕거나 앉아서 병실에 박혀있기만 하는 이 생활이 시간감각을 없애버리는 걸지도.


잠에서 깨어나면 밥을 먹고, 간호사나 의사가 종종 찾아와 이것저것 질문한다.

가족이 가져다 준 책을 읽거나 괜히 핸드폰을 만지며 누군가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다보면,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가고 잠들 시간이 찾아온다.



오늘도 호노카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평소였다면 아무 거리낌없이 호노카에게 전화를 걸었을텐데, 통화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가도 금방 취소하게 된다.

내가 내뱉었던 말 때문에 호노카가 오지 않는거라면 아마 전화해도 받지 않겠지.


지금까지 호노카가 내 전화를 받지 않거나 내 전화에 기분나빠한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 

나에게 3일 이상 전화를 걸어오지 않은 것도 처음이다.


우리 둘은 1년간,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걸어왔다.

서로의 어깨가 사라진다는 건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만약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호노카가 받지 않는다면- 난 분명...

노조미도 곁에 없는 지금, 마음의 상처를 견뎌낼 자신이 없다.



이틀 전 쯤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온종일 내 곁을 떠나지 않는 노조미에게 「나 때문에 일상을 포기하지 말아줘」하고. 간절히 부탁했다.

노조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내 부탁을 거절않고 따라주었다.


「대학이 쉬는 날마다 찾아오겠데이」라고 마지막으로 말하며 병실밖으로 떠나간 노조미.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왠지 손으로 인사해줘야 할 것 같았다.


노조미는 전화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찾아와줄것이다.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왠지 떠나가는 노조미의 뒷모습이,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버린 할아버지의 뒷모습과 겹쳐보였다.



오늘은 방금전까지 아리사가 내 곁을 지켜줬다.

아리사는 비밀로 해달라는 귀띔과 함께, 내가 혼자 있지 않게 해달라는 노조미의 부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며칠 전에는 니코도 찾아와주었다. 일이 바빴는지 마지막으로 봤을때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

니코는 스트레스로 가득찬 얼굴이었음에도 밝게 웃어주었다.

그 미소에서, 내게 힘을 주려고 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난 정말 좋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다.



손을 뻗어 커튼의 틈새로 얇게 들어오는 달빛을 어루만졌다.


「더 선명하게 보고 싶어. 달빛.」


생각만 하려 했는데, 입밖으로 말해버렸네-

혼자있는 시간이 길어진 후부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종종 하게 된다.



20cm정도 높게 고정된 오른쪽 다리를 천천히 빼냈다.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다. 아니, 아예 감각이라는게 사라진 것처럼, 다른 사람의 다리를 달고 있는 기분이다.


다리의 상태가 심각하기 때문에 절대 걷지말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었지만, 아무렴 어때.


바닥에 다리를 뻗기 직전 누가 볼까 싶어 병실안을 둘러봤지만 나밖에 없다.


그러고보니 여긴 1인실이었지. 1인실의 값비싼 입원비는 걱정하지 말라는 마키의 말이 떠올랐다.

분명 날 배려해준거겠지만, 이렇게 아무도 없는 것보다 소란스러운 다인실이 더 좋을 지도.



멀쩡한 왼쪽 다리가 바닥에 닿았다.

겨우 며칠동안 쓰지 않았을 뿐인데, 처음 자전거를 배웠을 때처럼 걷는것이 낯설다.


오른발에 힘을 빼고 왼쪽발로만 총총 뛰어 창문을 감싼 커튼을 걷어내자, 하얀 달빛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뮤즈의 모두와 함께 뉴욕을 찾아갔을때가 그리워진다.

밤늦게까지 잦아들지 않던 네온사인과 도시의 음향이, 달빛에 어울려 춤을 추던 그때.


『아- 모시모와 호시쿠나이케도 못토와 스키 Angel』

  (아- '만약'은 원하지 않지만 '좀 더'는 좋아 Angel)


창문을 열고 작게 노래를 불렀다.

노래부르고 춤출 수 있었던 그 때가, 이제는 손이 닿지 않는 달처럼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다.


더 노래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춤도 추고 싶어.



하지만 이제 밤이니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되겠지.


걷었던 커튼을 다시 치자 달빛은 숨바꼭질하듯 금새 모습을 감춰버렸다.

퇴원하게 되면 노조미랑 노래방이라도 가야겠어.


창문으로 왔던것과 똑같이, 침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뛰며 발을 옮긴다.



「아-」


침대 기둥에 발끝이 걸려, 균형을 잃어버렸다.

바닥이 나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것처럼 느껴져 눈을 질끈 감았다.

퍽- 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양팔에서 뻐근함이 느껴졌다.



「우윽..」



반사적으로 팔을 바닥에 짚어 얼굴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오른쪽 다리가 바닥에 부딪혀버렸다.

충격 때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도 잠시.


감각이 사라진 줄 알았던 다리에서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올라왔다.


「으..으아아아.....」


차라리 정신을 잃는 것이 나을정도로 엄청난 고통이 찾아와,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갖가지 신음을 토악질하듯 내뱉었다.


다리를 칼과 바늘이 난도질하는것 같아...



애써 잊으려했던 그날의 감각이 머리속을 파고들어와서, 아프고 무섭다.


횡단보도에서 넘어지고, 깨닫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자동차의 바퀴에 빨려들어가는 나의 다리.

온몸이 산산조각날것만 같은 끔찍한 감각, 뼈가 부스러지는 소리.


「호노카, 호노카, 호노카.....」


차가운 병실바닥에서 몸을 움찔거리며 몇 번이고 호노카의 이름을 불렀다.



호노카를 보고싶다.


찾아와주지 않는 호노카가 원망스럽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게 혐오감을 느낀다.




고통이 잦아들때까지 어느정도의 시간이 흐른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억지로 침대를 향해 몸을 질질 끌었다.


쓰러져있던 바닥에는 언제 흘렸는지 생각보다 많은 양의 눈물이 고여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부딪히지 않게 하기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천천히 침대위로 올라와 시계를 보자,

침대를 떠나고부터 한 시간이나 지난 상태였다.


다리는 아직도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조금 힘을 줄때마다 정신이 날아가버릴것같은 아픔이 다시 찾아온다.


『다시는 제대로 걷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의사의 말이 현실로 다가왔다.



「화려한 옷을 입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를 걷는 모델이 되고 싶었어.」


「지금까지 그것만 보고 살아왔어.」


「이제 어떻게해야 하는 걸까?」


개인물품 서랍에서 검은색 반지갑을 찾아, 펼치자마자 보이는 사진을 꺼냈다.

호노카와 내가 꼭 붙은채 함께 찍은 사진.


호노카는 늘 그렇듯 활짝 웃고 있었다.

문득 호노카에게는 나같은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섭다.

호노카가 나를 잊어버렸다는 착각이, 점점 확신이 되어간다.



해바라기는 늘 태양을 바라보지만, 태양에게 해바라기는 빛을 쬐는 수많은 생명중 하나에 불과하다.

병든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이고 잎을 떨어트리며 죽어간다 해도, 태양은 늘 그렇듯 누구에게나 빛을 베푼다.


모두의 태양 호노카.

호노카는 해바라기가 아니었어.


태양 같은 아이.

그렇기에 나만을 바라볼 수 없는 아이.



「호노카, 보고싶어. 나한테 힘을 줘.」

「어디 있는거야? 왜, 왜 찾아오지 않는 거야...!」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닿은 부분의 잉크가 점점 번지기 시작했다.


사진에서 내 얼굴이 점점 흐릿하게 지워져간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