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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장편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 -4-

날개를 잃은 천사는 연인을 기다렸다.


연인은 천사를 찾아오지 않았다.


천사는 날개가 사라진 어깨를 더듬으며 연인이 찾아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연인이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연인은 천사를 찾아오지 않았다.


천사는 마음을 접고, 혼자 날아오를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천사는 날개가 없기에 날아오를 수 없다.


...


마침내 연인이 천사를 찾아왔을때, 연인은 천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



-



팡-


알록달록한 무지개 무늬 우산을 펼치고 호무라의 입구를 벗어난다. 몇 발자국 걷기가 무섭게 우산 위로 빗물이 쏟아져내리며 후두둑하고 소리를 낸다.


어제만 해도 다같이 옥상에서 연습할 수 있을만큼 맑은 날씨였는데-

한여름의 날씨라는건 정말 변덕이 심하다.


우산이 미처 가리지 못한 부분으로 비가 들어와, 어깨를 조금씩 젖어가게 만들었다.

「이건 덤이야」라는 느낌으로, 바닥에서 튀어오른 빗물이 양말과 신발도 함께 적셔간다.


조금 축축하지만, 이렇게 시원한 비가 공기중의 먼지를 훑어내려가는것도 무척 좋아한다.


비가 오는 날은 정말 즐겁다. 하지만 지나치게 무리하다가 라이브를 망쳐버린 적이 있어서 그때 이후로, 나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그러고보면 코토리가 떠나려했던 그날에서부터, 벌써 1년이나 지났구나-

돌이켜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고,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뮤즈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 나와 에리가 함께한 나날.



문득 창밖을 홀로 바라보는 에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TV에서 본적있는데-


에리가 우울해하거나 외로워하지 않을까?


나만의 작은 바람이지만, 에리가 나를 보고싶어해준다면 정말 좋을텐데.


에리가 「왜 지금까지 찾아오지 않은거야! 호노카를 얼마나 보고싶었는데」하며 어린애처럼 화낼 때, 내가 에리를 부둥켜안고 '미안해 에리쨩.. 사실 보여줄게 있어.' 하며 분위기를 내는거야. 그리고-


「에리쨩만을 위한 특별 라이브! 하고 깜짝 소식을 전하는거지!」


아, 너무 크게 말했나?


주변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웅덩이가 이곳저곳 들어찬 길에 발을 힘차게 디디자,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이 치마까지 튀어올랐다.


조금씩 뛰어가다가 웅덩이를 몇번 더 밟게 되니 치마까지 잔뜩 물을 먹어 축축해졌다.

비릿한 빗물냄새가 코를 찔러들어왔다.


이래서는 물에 빠진 꼴이잖아- 일주일만에 에리를 보는건데..

에리가 잔소리할지도 모르겠네.



찰박, 찰박, 찰박.


바닥에 고인 빗물이 발걸음과 만나 간단한 리듬을 연주한다.



어느새 병원의 정문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니시키노 병원이라 적힌 큼지막한 대리석 기둥이 지키고있는 정문을 지나, 넓찍한 주차장에 줄맞춰 늘어선 자동차들과 인사.



병원 건물 입구에 다다르자 방금 도착한것처럼 보이는 앰뷸런스가 급하게 멈춰섰다. 앰뷸런스의 뒷문이 벌컥 열리고  들것에 실린 환자를 구급 대원들이 바쁘게 나른다.


하이힐을 신은 채 종종걸음으로 그 무리를 따라가는 여성은 아마도 배우자.



저 사람도, 소중한 사람이 아파하는걸 옆에서 지켜봐야만 했을까?


그 무력한 느낌과 당황, 뒤를 이어서 찾아오는 죄책감...


자동문이 닫힌 후에도 한참동안이나 응급실을 쳐다보다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빨리 에리를 만나러 가야하는데-

에리가 머무는 6층의 병실. 아마 저기쯤이려나?


병원 창문들을 주욱 보며 에리가 있는 병실 창문으로 눈을 옮겼다.


「앗..」


에리는 창문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다른생각에 빠져있는 건지, 내가 낸 소리에 전혀 반응해주지않았다.


「에리쨩-!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소리높여 몇번 더 불러봤지만 에리는 아키바의 도심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깨에 걸친 얇은 하얀색 담요가 비바람을 맞아 조금씩 나풀거리자, 마치 천사에게 돋은 날개처럼 보였다.


저 아름다운 천사님은, 내 목소리도 듣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잘 보이지 않아도, 에리가 미소짓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행복한 미소인지, 아니면 그때의 에리처럼 슬픔에 젖은 미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자이길 바랐다.



에리가 어서 무거운 마음의 짐을 벗어줬으면 좋겠네-

만약 스스로 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아. 나와 모두들이 있으니까.


함께 힘내다보면, 우리가 늘 그래왔듯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채로 자동문을 지나기 직전이었다.


왜일까, 다시 한번 눈에 새겨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와 6층 병실 창문을 올려다봤다.


「에리..쨩?」


창틀에 기댄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에리는, 조금 전보다 훨씬 키가 커 보였다.


의자 위에 올라섰는지, 오른쪽 허벅지의 깁스가 창틀 위로 조금 드러날 정도였다.


다리가 아플텐데... 무리해서라도 의자 위에 올라선 건, 비오는 날의 아키하바라를 좀 더 유의깊게 보고싶어서일까?



하지만 에리는 내 예상과 달리, 바라보는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조심스레 창문의 양옆부분을 손으로 잡아 살짝 뛰어서 창틀위에 올라섰다.



잠겨있던 새장의 문이 어느날 열린 것을 알아챈 새가, 밖으로 날아오르는 준비를 하는 모습처럼.


이번엔 어깨에 걸친 담요가 새의 날개처럼 보였다.



에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자, 무의식적으로 나도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늘에서는 거무스름한 먹구름 떼가 옹기종기 모여 장대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마 기분탓이겠지만, 그 순간 에리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어느새 창틀을 붙잡고 있던 양손을 놓은 채, 다치지 않은 왼쪽 다리 하나만으로 스스로를 지탱한 에리의 모습.



나는 그런 에리를 아무생각없이 쳐다보다가「에리쨩이 대체 왜 저러는거야?」하고, 아무도 듣지 못할정도로 중얼거렸다.


「...!」


중얼거림이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짧은 순간, 깨닫고 말았다.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해버렸다.


불안의 꽃봉오리가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새까만 꽃잎을 활짝 피워 고개를 흔든다.



나도 모르는 새에 우산을 근처에 내팽개치고 창문 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에리쨩!!!」


내 마음이 에리에게 닿기를 바라며 온갖 힘을 쥐어짜내 소리질렀다.


다급한 나의 외침, 그 외침이 신호탄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하는 에리.

에리의 불행이 시작된 내 생일에 느꼈던 것과 같은 감각이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해주는 천사.


천사는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어깨에 걸친 하얀 날개로 날아가는 금발의 천사.


빗물이 내 눈에 떨어져 눈을 감았다가 뜨는 동안,


천사는 하늘 위 구름 너머로 날아가는 대신 쏟아지는 비에 몸을 맡기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철퍽-


...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침묵이 찾아왔다.

내가 입을 벌린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안 「꺄아아악-」하고,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퍼진다.


「에... 으, 에...」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리가 생각을 멈춰버린 것 같았다. 혼란때문에 술에 취한것처럼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길바닥에 쓰러져 처량하게 비를 맞고있는 사람이, 에리인지 아닌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입으로는 그저 끊임없이, 에리를 불렀다고 생각했다.

쓰러진 에리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고, 말을 건넸다.


「에리쨩!! 왜, 왜, 어째서...!」


에리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피는 쏟아져내리는 비와 섞여 바닥에 떨어진다.

에리에게서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다.


「피, 피가... 안돼, 피, 아흑...」


피를 손에 받아냈다가, 무의미한 행동이라는걸 깨닫고 다시 에리를 감싸안았다.

온몸이 엉망진창이었다.


빗소리의 틈에서 미약하게나마 에리의 호흡이 느껴졌지만,

이미 그 숨소리만으로도 생명의 촛불이 꺼지기 직전까지 잦아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에리쨩, 에리쨩... 안돼, 일어나줘, 일어나, 제발!」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버릴것만 같았다.

다시 손을잡고 걸어갈 수 없다, 어깨를 기댈 수 없다, 미소를 볼 수 없다.


에리와 함께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쏟아지는 피와 함께 잡을 수 없는곳으로 달아나려한다.


에리의 어깨를 죽을 힘을 다해 흔들었다.


그 순간, 무겁게 닫혀있기만 하던 눈꺼풀이 아주 잠깐, 열렸다가 닫혔다.


「...에리쨩. 조금만 기다려. 여긴 있잖아, 마키쨩의 파파가 운영하는 병원이야?

   엄-청 뛰어난 의사선생님들이 엄-청나게 많아! 조금만, 조금만 견디면 될거야. 조금만...」


「호.. 커흑-」


짧은 기침과 함께, 에리의 입에서 말 대신 붉은 액체가 터져나온다.

숨소리라고 말하기도 힘들만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쇠가 마찰하는것처럼 거친, 듣기만해도 아픔이 전해지는 에리의 호흡 소리.


「잠깐만 쉬고 나면, 금새... 괜찮아질거야. 괜찮아질거라구...

   에리쨩이 퇴원하면 가려고 시내의 디저트 카페도 알아놨어. 함께 보고싶은 영화도 정했어!

   그리고... 그리고말야.. 에리쨩한테 보여주려고, 다같이 라이브 연습도」


에리가 거의 느껴지지않을만큼 작은 힘으로 나를 자기쪽으로 잡아끌었다.

뭔가 말하려는것 같아, 입에 귀를 기울였다.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겨우 들릴만큼 작은 음성으로 「호노카」라고 말했다.

에리는 내 이름을 부르기 위해 피를 두번이나 더 뱉어냈다.


「더이상 말 하지마!」


에리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나도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아니. 아마도 그때 에리의 생명은 위태로운 상황을 넘어, 이따금 불씨가 깜박거리는 잿더미처럼 꺼져 없어진다는 미래만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에리는 말을 하는것을 포기했는지 소리를 내는 대신 끊임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알아듣기를 바란다는 표정으로, 「고마워, 미안해.」 두 마디만을 입모양으로 계속해서 전해왔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미안한건 난데... 나만 아니었으면 에리쨩은...」


에리는 고개를 젓고 눈웃음을 지었다.

작게 뜬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연하늘색 눈동자가, 구름 낀 하늘처럼 탁해진 것처럼 보였다.


에리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기운이 전부 빠져버렸는지,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어느새 사람들이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방금 전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 같았다.

다가온 무리에는, 의사처럼 보이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도 몇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나와 에리를 떨어트려놓고 응급실로 에리를 실어갔다.



누군가가 내게도 손을 뻗어왔지만, 뿌리쳤다.

에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하늘을, 몇 번이고 눈에 새겼다.


내 옷 가슴팍에 질척한 피가 묻어있었다. 이대로 두면 빗물에 씻겨내려갈것만 같아, 두손으로 감쌌다.


에리는 병실의 창문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까맣게 뒤덮인 먹구름 뒤에서 무엇을 봤을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떨어지는 비를 맞았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에리를,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싶었어.

에리가 나와 닮았다 말했던 해바라기처럼.


언제까지나, 평생.

그러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연푸른 빛깔의 소원 위에 검고 탁한 현실이 스며든다.



더 이상 하늘을 볼 수 없게 된 에리,

더 이상 에리를 볼 수 없게 된 나.


추락한 천사와 해바라기는, 더 이상 서로를 마주할 수 없다.



나와 에리가 함께하자 약속했던 그날에서부터,

아주 짧고도 짧은, 1년하고도 13일이 지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