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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단편

조명이 꺼진 뒤에도, 가수는 음악을 꿈꾼다.

흐르는 멜로디를 따라 머리칼이 휘날린다.


가사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모두의 목소리와 어우러진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 그 땀마저 기분 좋게 느껴졌기에 닦아내지 않았다.


노래에 맞추어 저마다 가지각색의 형광봉을 들고 흔드는 관객들,

들려오는 그들의 환호와 응원소리.



음악이 끝나자 스포트라이트가 꺼진다. 긴장 때문에  한꺼번에 숨을 몰아쉰다.


다음 무대가 열리기 직전의 짧은 순간.

마음이 이어진 듯 모두와 눈이 마주치자 입가에 미소를 띤다.



지금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노조미쨩! 다음 노래가 이번 무대의 마지막이야.』


손을 내미는 호노카.


『뭘 멀뚱멀뚱하게 서있는 거야? 노조미.』


니코.



『…….』




뮤즈의 모두와 함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뮤즈의 세계ㅡ



...



「오랜만이네.」


「...!」



짤랑ㅡ


커피를 휘젓던 티스푼이 유리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노조미는 에리의 말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손바닥만 한 노트를 품안에 숨겼다.


펼쳤던 노트를 닫고 품속에 집어넣자, 눈앞에 뒤덮은 꿈의 세계가 쓰디쓴 커피향이 퍼지듯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뮤즈의 노래가 사라지고, 카페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빈자리를 채운다.



『아쉽구마…….』



「노조미?」


에리가 눈앞에 대고 손을 휙휙 흔들었다.


「에... 리치! 아침에도 얼굴 봐놓고 오랜만은 뭐꼬. 과장이 심하다 아이가.」


「그런가~? 후후…….」


당황해서 조금 과장된 말투로 대답했는데, 에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것처럼 보였다.

기쁜 일이라도 있는 건지 생글생글ㅡ 얼굴에 꽃이 핀 것처럼.



「좀 전까지 아르바이트해서 피곤하데이. 그냥 집에서 만나는 게 낫지 않나?」


대학과정을 마치고 영어교사로 취직할 자리를 찾아다니는 에리.

그런 에리와 동거하며 프리터 생활 중인 노조미.


어린아이들이 잠들기 시작하는 시간을 훌쩍 넘겨버린 밤.

이런 늦은 시간의 외출은 둘 모두에게 피곤한 일이었다.


특히나 노조미는 오늘 아르바이트 두 개가 겹쳐,

하루 종일 손님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바람에 입이 경련할 정도였다.


『물론 에리치와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싫은건 아니지만ㅡ』


에리는 백을 테이블 위에 대충 올려놓고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서 만나자고 한 이유는 말이야. 사실, 중요한 소식이 있거든.」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얼굴 옆에 바싹 붙어서 말한다.

귀에 따듯한 에리의 숨결이 와 닿는다.

의식하면 할수록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다.


「에리치도 참, 귀 가렵다 아이가.」


고개를 홱 돌리자 에리가 웃음소리를 냈다.

분명 능글맞은 표정이겠지ㅡ



「커피 주문하고 올게. 노조미는 역시 아메리카노?」


「에……. 아직 남아있는데.」


「뜨거울 때 먹는 걸 더 좋아하잖아.」


잔을 들어 반쯤 남은 커피를 보여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즉답.

에리는 능숙한 몸놀림으로 가방과 옷을 정리하고 주문을 하러 갔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죽 이어진 8년의 인연.

서로를 자기 자신만큼이나, 어쩌면 스스로보다 더욱 잘 알게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노조미는 생각했다.


어차피 이야기하다보면 새 커피도 식을 텐데ㅡ 하고 말해주려고 하다가,

잔에 남은 커피를 홀짝거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에리가 애써 해준 배려를 마다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잔을 내려놓고 커피에 희미하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예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얼굴.

사람들에게 '소녀'나 '스쿨 아이돌'이 아닌,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나이.



에리가 테이블로 돌아오더니 「쿠폰을 깜빡했어.」하고는,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다시 계산대로 향했다.

저렇게 능숙한 척 하면서도 어설픈 모습이, 에리의 매력 포인트 아니려나?

이번에는 노조미가 입 꼬리를 올렸다.


에리가 영어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땐 깜짝 놀랐다.

에리라면 좀 더 빛나는 직업을 할 거라 생각했는데. ㅡ물론 에리쪽에서도 노조미가 대학진학을 포기하는걸 보고 적잖게 당황했겠지만ㅡ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분명 에리라면 학생들을 잘 지도하는 선생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어리숙해도 할땐 잘 하는 아이니까.



에리가 계산에 정신이 팔린 동안, 품안에 숨겼던 노트를 꺼내 테이블 아래로 숨겨 다시 읽기 시작했다.


뮤즈의 추억을 쓴 노트.



오토노키를 졸업하고 각자의 삶을 향해 걷게 된 지도 벌써 5년째 ㅡ물론 각자의 삶이라곤 해도, 연인관계인 에리와는 꼭 붙어살고 있지만ㅡ


모두와는 연락하며 지내지만, 다같이 함께 노래하던 그 때를 잊을 수 없다.



노조미가 이 노트를 접하게 된 건 무감각한 일상을 보내던 몇 달 전의 일.


그날도 아르바이트 출근을 위해 바삐 걷다가, 새로 개업한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건물을 두 개는 합친 것만큼의, 편의점치고는 상당히 커다란 규모였다.

마법에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가 자기도 모르게 노트 하나를 집어들었다.


마키의 작곡노트와 같은 보라색 컬러.



그 노트를 산 이후로 틈이 날 때마다 뮤즈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머릿속에서 어렴풋한 이미지로 머물던 추억이 구체적인 형태로 노트에 자리잡아갔다.


상상의 세계에서 뮤즈는 졸업하지도, 마지막 라이브를 하지도 않는다.

영원히 노래하며 함께 웃을 수 있다.


지루한 현실에서 노트로 눈을 돌릴 때마다 그곳에서 천국이 펼쳐졌다.



그녀는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프리터 생활을 몇 년째 지속하고 있음에도 불행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에리와 함께 하며, 과거의 황금빛 추억에 잠겨 산다면.

평생을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에리는 어느새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노조미를 응시하고 있었다.



툭.


「아ㅡ」


급하게 노트를 숨기다가, 손이 꼬여서 바닥에 떨어트려버렸다.


「노조미.」


「와?」



「여기 아메리카노.」


「에……. 응. 에리치, 고맙데이.」


당황한 것을 감추기 위해 커피를 빨대로 조금 빨아들였다가, 너무 뜨거워서 맛도 못 느끼고 삼켰다.

입천장이 얼얼하다.


「나한테도 보여 줄래?」


「안 된다.」


단호하게 대답하자 에리가 의자를 고쳐 앉더니 빤히 바라봤다.

이미 노트를 숨기기엔 한참 늦어버렸다.



「방금 전에 내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도, 노조미는 한참 동안 그 노트를 보고 있었지.」


「...프라이버시 침해구마.」


「노조미. 힘든 일이 있다면 내게도 말해줬으면 해. 우린 연인이잖아?」


「…….」


「몇 달 전부터 생각했어. 노조미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그 노트랑 관련 있는거 맞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가로젓자, 에리가 한숨을 짧게 늘어 쉬었다.


「한 번 더 거절한다면 더 이상 말 꺼내지 않을게. 그만큼 보여주기 싫다는데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부탁이야. 그 노트, 보게 해줘.」



「...정말.. 에리치도 심술궂데이. 그렇게 말하면 보여줄 수밖에 없잖나?」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

에리의 이런 태도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닌 걱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건 처음이라 쑥쓰러웠지만, 에리도 뮤즈의 일원이니 분명 노트를 마음에 들어할 것이다.


「별거 아닌데-」하며 슬쩍 감추려고도 해봤지만 에리의 등쌀에 어쩔 수 없이 노트를 내밀었다

노트를 넘겨받은 에리는 언제 화났냐는 듯 장난감을 선물받은 아이마냥 금방 표정을 풀었다.


『에리치에게 져버렸네.』



위잉-


때마침 울린 호출벨이 묘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커피가 다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


미간을 찡그린 채 노트를 읽는 에리의 모습이 귀여워서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커피를 식게 둘 수는 없어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의 쟁반에는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영수증, 카페모카가 올려져있었다.


에리는 고등학생이었을 때 그랬듯 카페에서는 늘 달달한 커피를 주문한다.

카페모카, 마키아토. 더운 날이면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섞여진 프라페와 아포가토.


심지어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카페모카 위에 휘핑크림까지 잔뜩 얹어져 있었다.


저런 걸 잔뜩 먹으면서도 조금도 살이 찌지 않는 걸 보면 완전 축복받은 몸.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테이블로 돌아오는 동안, 에리는 아직도 방금 전의 표정 그대로 노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노트에 깊이 빠져들었는지 커피를 바로 앞에 내려놨는데도 모르는 눈치였다.


읽고 있는 페이지를 힐끔 쳐다보니 가을 학원제에 관한 이야기였다.

노조미와 에리가 각각 로미오와 줄리엣 역할을 맡아 연극을 했던 소중한 기억 중 하나.



「저……. 에리치? 중요한 소식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어ㅡ 맞아!」


깜짝 놀라는 에리.

노조미는 아까의 자신도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도 있긴 하지만, 먼저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네.」


에리가 손가락 끝으로 공책을 톡톡 두드렸다.


「노조미가 요즘 들어서 멍하던 이유가 이 노트 때문이지?」


「...맞데이.」


「이건 압수.」


「에?」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노트가 에리의 백에 들어가는 것을 잠자코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노트 말이제, 내한테는 진짜 소중한ㅡ」



「뮤즈의 추억은 나한테도 정말 소중해. 그렇지만.」


에리는 말을 길게 이으려는 듯 휘핑크림을 커피와 뒤섞은 후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추억은 추억일 뿐이잖아? 과거의 기억이 지금을 살아가는데 지장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노조미도 잘 알고 있잖아.」



아니야,

아니야.


에리는 잘못 알고 있다.

뮤즈는, 추억의 한 조각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너무나ㅡ


「그보다 중요한 소식에 대해서 말인데……. 노조미, 듣고 있어?」


「에리치한테는, 뮤즈가 그 정도밖에 안되는거였구마.」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아이다. 내가 너무 집착하고 있는 거겠제ㅡ 중요한 소식이라는 게 뭔데?」


에리는 중간에 말이 끊어져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곧 미소를 띠더니 컵을 잡은 노조미의 손 위에 두 손을 얹었다.


「노조미. 그동안 고생 많았어.」


「...?」


「나, 드디어 취직했어. 초임 교사라서 아직 페이는 그렇게 높지 않지만ㅡ 우리 둘이서 먹고 살 정도는 돼.

   거리도 전철로 왕복 한 시간이라 집을 옮길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당장 다음 주부터 출근하래.」


그 말을 곱씹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는 건」


「그래. 이제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고, 하고 싶은 걸 찾는 거야!

   노조미가 날 지금까지 도와줬잖아? 이번엔 내 차례야. 노조미의 꿈을 돕고 싶어.」


「에리치.」


방금 가방 속으로 집어 넣은 게, 내 꿈인데.



「응?」


「내한테 꿈이라는 건 말이제……. 언제나 뮤즈가 전부였고, 지금도 그렇데이.」


「노조미. 언제까지 과거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어.」


「에리치한텐 아닐지 몰라도, 내한테는 뮤즈가 꿈이래이. 그것만 있어도 행복해!」


가시 돋친 말이 입안에서 맴돌기도 전에 에리를 향해 쏘아졌다. 연인관계로 지낸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이만큼 상대에게 화를 낸 건 처음이었다.


「…….」


「노트, 돌려줘.」


여태까지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말을 뱉어낸 스스로도 놀랐을 만큼 차가운.

따듯한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갔지만 오히려 추위를 느꼈다.


에리가 백의 지퍼를 열고 노트를 내밀었다.

노트를 잡은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눈을 마주치자 푸른 눈동자가 구름낀 하늘처럼 일렁인다.


에리에게 뿜어냈던 화가, 죄책감이 되어 돌아온다.


늘 그랬듯이 안아주고 싶었다. 괜찮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처음 노트를 샀던 때처럼 마법에 이끌리듯 에리의 손에서 노트를 낚아채 문밖으로 향했다.


「저기……. 노조미.」


「따라오지마래이.」


「어디 가는 거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촉촉한 눈물이 묻어있었다.



「자정이 되기 전까지는 집에 들어갈테니께 신경 안 써도 된다.」



딸랑-


문 위에 매달린 은색 종이 울렸다.



-



밖은 벌써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겨울 날씨는 아니었지만 이른 봄의 추위가 입고 있는 트렌치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게 만들었다.


노조미는 걸음을 늦추고 노트를 꺼냈다. 이제 보니 노트의 표지가 조금 구겨져버렸다.

에리가 가방에 넣을 때? 아니면 에리에게서 노트를 돌려받을 때 구겨진 걸까?


펼쳐보려했다가 손이 시려 다시 품안에 집어넣고 인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꿈의 미로, 유리의 미로ㅡ』


핸드폰이 주머니 속에서 움찔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누구의 전화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기에, 신경질적으로 배터리를 분리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외곽에서 도심 쪽으로 걸어갈수록, 어둠은 줄어들고 상가 건물들의 간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길을 비추었다.

현기증이 들 정도로 강렬한 빛.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아키바의 도심에서,

노조미는 그 누구보다도 외로움을 느꼈다.



『에리치한테 내가 무슨 짓을 한 기고?』


후회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지금이라도 에리에게 돌아갈까, 화 많이 났겠지ㅡ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중에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노조미는 갈곳을 잃은 채 길을 떠도는 자신의 모습이, 

쑥스럼 타는 아기 신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 ♬ㅡ


...!



익숙한 멜로디가 귀를 건드렸다.


처음엔 늘 상상하던 것처럼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어두운 곳으로 다가갈수록 노랫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모두가 함께 부른 뮤즈의 노래.

노조미는 노래가 들리는 곳을 향해 한걸음씩 발을 디뎠다.


노랫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가로등이 없는 외진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환한 빛에 이끌린 나방처럼, 아무 생각 없이 소리를 좇았다.


자신의 파트가 돌아올 때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핸드폰의 음악 폴더에서 수십 수백 번 들었기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멜로디, 가사, 안무에서부터ㅡ 모두의 표정까지.

눈앞에서 라이브를 하는 것처럼 뮤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제…….」



픽-


혼잣말이 끝나자, 언제 들렸었냐는 듯 노랫소리가 자취를 감췄다.

어둠과 외로움이 다시 노조미를 덮쳐왔다.


주변을 돌아봤지만 눈에 익은 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외딴 무인도에 갇혀버린 감각.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한 걸음을 내딛는데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핸드폰 라이트를 켜려다가 전원을 꺼둔 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핸드폰을 켜면 에리치가 전화하겠제ㅡ』 아까의 일 때문에, 에리와 대화하는 것은 잠시 미뤄두고 싶었다.



「모두들, 나 혼자 여기에 두고 어디 가버린 기고…….」


항상 그랬다. 지쳐서 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쉬지 않고 떠나가 버린다.

현실을 찾아 하나 둘 옆자리를 떠나간다.


9명이 언제까지나 함께 할 거라 생각했던 뮤즈는,

공연이 끝난 후의 무대처럼 하나 둘 사라져갔다.


뒤쳐진 노조미는 늘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다.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뒤에도, 무대를 떠나지 못한 채, 과거에 묶여있을 뿐.



「아ㅡ 저기는.」


다리위에 길게 늘어선 가로등과 그 밑으로 흐르는 강물.

가끔 시내에 놀러왔을때 본 적 있는 칸다 강이었다.

강을 발견하니 주변 건물과 길을 어렴풋하게나마 감 잡을 수 있었다.


노조미는 난간에 손을 얹고 강물이 흐르는 물결을 잠자코 지켜봤다.


「그러고 보니 어떤 나라에서는, 강물에 뛰어내리면 오토노키자카로 갈 수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구마.

   쿡쿡ㅡ 말도 안 되는 우스갯소리.」



『그때의 오토노키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노조미에게 필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뭐든 해낼 수 있었던, 고등학생이었을 때의 그 시간.


눈앞에서 환하게 빛나지만, 결코 손에 닿을 수 없는 가로등 불빛 같은 추억.



『노조미쨩!』


「호...노카?」


『파이토다요!』


강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호노카가 나타나 노조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뭘 그리 어리둥절하나? 이럴 땐 의문갖지말고, '스피이츄얼하네'하고 넘어가면 되는 기다.

   내가 늘 그랬던 것처럼 말이제.』


「너는...?」


반대쪽 어깨에 손을 얹은 건 5년전의 자신.

아직 어린 티를 다 벗지 못한 노조미였다.



『좀 전에 에리치가 말했던 거 기억하나?

   에리치는, 내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말했데이.』


「…….」



『이제 놓아줄 때가 된 거래이. 우리는 추억의 한 조각으로, 가슴에 남으면 그거로 됐다.』


노조미의 곁에 선 어린 노조미가, 누구보다도 해맑게 웃었다.



『잊어달라는게 아닙니다. 언제까지고 잊지 말아주세요.

   우리를 마음에 담은 채로 앞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우미의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봤다.


호노카와 어린 노조미뿐만이 아닌, 뮤즈의 모두가 노조미의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린, 하나요, 마키.

호노카, 우미, 코토리.

니콧치, 에리치. 그리고... 나.


「내가 걱정돼서, 눈앞에 나타나 준 거구마.」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지만 모두의 마음이 전해졌다.

모두들 웃고 있었다.

그 아이들과 함께 웃고 싶었다.


그러나 웃음을 바라보면 볼수록,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다들 신경써줘서 고맙다. 그리고 정말, 정말로ㅡ」



「미안하데이…….」



풍덩-



-



「노조미ㅡ!」


에리는 벌써 열 번도 넘게 눌렀던 통화 버튼을 다시 눌렀지만, 돌아온 건 이전과 같이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안내메세지였다.


불길한 예감 탓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노조미는 시간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편이다.

카페에서 나가기 전, 자정까지 집에 돌아온다고 말했음에도 핸드폰에 표시된 시각은 벌써 한 시.


「내가 잘못했어, 내가, 내가 노조미를 이해해주지 못한 거야. 누구보다도 힘든건 노조미였는데ㅡ」


쫓아갔어야 했는데, 노조미의 차가운 태도에 당황해서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대책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대다가 결심을 세웠다.


『경찰에게 연락해야겠어.』


바스락.


「...!」


「에리치?」


파출소의 전화번호를 고민하다가 겨우 떠올렸을 때,

저 멀리서 노조미가 오른손에 든 봉투를 흔들더니 멋쩍게 미소 지었다.


「아깐 미안했데이. 사과의 표시로 에리치가 좋아하는 초콜릿 사느라 늦었ㅡ」


「노조미!!」


소리치며 달려가 연인의 품에 파고들었다.

노조미는 대답하며 위로해주는 대신,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



「그런데 노조미, 노트는…….」


「쿡쿡쿡- 에리치 얼굴이 그게 뭐꼬.」


한참 후에 고개를 든 에리는, 얼굴 화장이 이리저리 번져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강에 던졌데이. 풍덩ㅡ 하고 강바닥으로 가라앉아버렸구마.」


「그걸로 된 거야...? 아까 무엇보다도 소중한 거라고 말했잖아.」


「과거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데이. 에리치의 말이 정답.」


「…….」


물티슈를 꺼내, 연인의 얼굴을 닦아준다.

티슈에 첨가된 블루베리향이 에리의 마음을 풀어주기를 바라며.


「생각해봤는데. 내는 역시 무대 위에서 모두의 환호를 받고 싶다.」


「하지만ㅡ」


「그래서 앞으로 내 꿈은, 뮤지컬 배우가 되는 기다.

   그동안 해준 게 많으니께 평생 도움 받을 거래이. 괜찮제?」


「...환영이야.」


에리는 조금 떨어지더니, 방금 전에 어리광부렸던게 부끄러운지 등돌린 채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노조미.」


「와?」


「내일 오랜만에 다같이 모일까? 니코랑 코토리는 멀리 있어서 못 올 것 같지만.」


「그래.」


아무 인적도 없는 어둡고도 따듯한 밤, 에리와 함께 걷는 둘만의 거리.



밤의 찬 공기를 타고, 작은 속삭임이 날아와 귓가에 앉았다.


『빛을 좇아온 우리들이니까, 안녕이라곤 말하지 않아.』

『다시 만나자, 불러 줄거지? 우리들을ㅡ』


「그래.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언제든지.」



「뭐라고 말했어?」


「으응, 아무것도.」


노조미는 길옆의 커다란 가로등을 올려다봤다.

길을 비춰주는 가로등과, 무대를 비춰주는 스포트라이트.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좇아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

시간이 지난 후 언젠가 뒤를 돌아봤을 때,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보고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조명이 꺼진 뒤, 가수는 무대를 떠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새로운 무대를 찾아, 그 위에서 다시 노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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