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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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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새 교실, 새 사람들, 새 학교. 나에겐 모두 의미없는 이야기였지만, 한가지만은 퍽 마음에 들었다. 여기 음악실에 피아노가 있었다는 것이다. -3일전- 잊혀질만도 했지만 계속 이유없이 꿈에서 나오는 그날의 기억. 2등이라는 작은 균열감. 의사가 되고싶었고, 아버지와 같은 입장이 되고싶었다. 누가봐도 인정할만할 멋진 사람이 되고싶었다. -마키가 벌써 말을 한다고? 대단하네. -마키가 벌써 글자를 쓴다고? 정말? -마키가 벌써... -피아노를 시작했다고? 알아서 잘하겠지. 그리고 그날, 2등이라고 적혀있는 작은 트로피를 보신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 작디작은 실망감이 지나갔었다. 퉁퉁부었던 눈을 작은 손으로 닦으며, 칭찬, 혹은 위로를 바랐던 작은 아이는 그 얼굴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니시키노 마키는 아..
달려가는 그 손을 붙잡아 “뭐, 무슨 소리야.” “에. 있는 그대로 말한건데, 혹시 못 알아들은건가? 헤어지자는 말이었는데-” 내 앞의 자그마한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갸우뚱거렸다. 마키쨩은 똑똑한데 이런건 의외로 바로 못알아듣네, 라면서. 나 역시 그녀가 어째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야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 특집의 생방송 오디션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그녀가 오랜만에 만나자며 겨울방학의 공부로 바쁜 일요일의 나를 불러내서는, 자주 다니던 카페의 지정석과 다름없는 창가 쪽 구석진 자리에 마주보고 앉아, 꽤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어갈 쯤에, 갑자기 저런 괴상한 문장을 내뱉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늘 그랬듯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오디션 준비로 ..
잊고 싶지 않았어, 끝까지 “저기, 언제까지 잘 생각이야?” 내가 눈을 뜬 장소는, 이미 졸업한 내가 있을 곳이 아닌 오토노키자카의 학생회실이었다.어떻게 된 일인지 나 혼자 온 것으로 기억나는 학생회실에, 있을리 없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항상 그랬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에게 조금 서툰 사투리로 말을 걸었다. “뭐야. 호노카가 ‘깜짝생일파티’ 하는걸 어젯 밤에 모르고 너한테 라인 보내버렸다며?” “아, 그래서 내가 모른 척할려구 학생회실에 숨어들어왔제. 근데 왜 니콧치가-” “그야! 학생회실을 꾸미러왔더니 본인이 들어와서 자고있었으니까야아아-!!” 니코는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아아악-하는 괴성을 질렀다.그런 거였구나. 나는 당연히 우리가 쓰던 부실을 꾸밀줄 알았다. 그도그럴게 항상 누군가의 생일 때면 어찌됬던간에 부실을..
조명이 꺼진 뒤에도, 가수는 음악을 꿈꾼다. 흐르는 멜로디를 따라 머리칼이 휘날린다. 가사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모두의 목소리와 어우러진다.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 그 땀마저 기분 좋게 느껴졌기에 닦아내지 않았다. 노래에 맞추어 저마다 가지각색의 형광봉을 들고 흔드는 관객들,들려오는 그들의 환호와 응원소리. 음악이 끝나자 스포트라이트가 꺼진다. 긴장 때문에 한꺼번에 숨을 몰아쉰다. 다음 무대가 열리기 직전의 짧은 순간.마음이 이어진 듯 모두와 눈이 마주치자 입가에 미소를 띤다. 지금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노조미쨩! 다음 노래가 이번 무대의 마지막이야.』 손을 내미는 호노카. 『뭘 멀뚱멀뚱하게 서있는 거야? 노조미.』 니코. 『…….』 뮤즈의 모두와 함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뮤즈의 세계ㅡ ... 「오랜만이네.」 「...!」 짤랑ㅡ ..
노조에리 초콜릿 작전 아무도 없는 한적한 부실.천천히 문이 열리며 그녀들이 들어온다. “저기 니코. 초콜릿 만들었어? 응? 만들었지!” “에? 당연하지. 너희들한테 주려고 사랑이 담긴 수제♡러브니코♡초콜릿을 잔뜩 만들어왔다고.” “그런 걸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이 잘도 말하는 구나…….” “먹고 싶어! 니코가 직접 만든 수제♡러브니코♡초콜릿 먹고 싶어!” 2월 14일.BiBi 유닛 곡의 연습을 위해 모인 그녀들이었지만, 연습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이 어느 샌가 발렌타인 초콜릿 이야기로 변질되고 말았다. 시초는 아야세 에리였다.초콜릿을 보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하는 그녀로써 발렌타인데이는 그야말로 사랑의 결실, 1년이라는 긴 세월 사이의 하루뿐인 축복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사물함은 후배들의 사랑이 담긴 초콜릿으로 가득 차..
호노카의 저녁 어두운 밤이 찾아올 무렵, 호노카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창문 밖에선 달빛이 쏟아져 그녀의 방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책상 위엔 노트북 하나가 올려져 있었고 그곳에는 어라이즈의 영상이 끝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호노카는 그 영상을 끝까지 보게 되면 다시 반복해 처음부터 보는 것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어라이즈의 노래는 멈출 줄 몰랐다. 방 가득 계속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방에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시야를 비추는 유일한 빛은 형광등이 아닌 달빛이었다. 호노카는 되풀이해서 재생하는 것을 수십 번 한 뒤 어느 순간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침대로 향해 등을 맞대고 두고 누워버렸다. 호노카의 눈빛에는 어쩐지 서글픈 분위기가 자리 잡고 ..
폐교, 그리고 나타난 길 그날 학교 복도 벽면에 붙어있던 말을 잊지 못한다. 단 두 글자였다. 가장 큰 크기로 맨 위쪽에 쓰여있던 소식은 더할 말도 없었고 덜어낼 말도 없었다. 폐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의미가 너무나 컸던 그 말이었다. 평소처럼 우미와 코토리와 학교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날도 빵을 사 먹으러 교실을 나가려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여러 사람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갑작스러운 말에 우미와 코토리는 서둘러 학교의 게시판으로 가 보았다. 그러나 소문은 사실이었다. 너무도 황당하게 폐교라는 말이 쓰여있던 탓에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우미나 코토리도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살짝 몸이 흔들려 뒤로 넘어질 뻔했다. "호..
다시 시작하기 마구 쏟아지는 한밤 도시의 불빛들은 호노카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히 밝았다. 그녀는 지금 오토노키자카 앞, 눈이 부시는 밝은 거리의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과 높은 건물들 틈에서 호노카는 귀에 헤드폰을 착용하고 걷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무슨 목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뮤즈의 해체 후 공허해진 마음은 이리저리 휩쓸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 눈앞의 환상적인 불빛은 그런 것을 다 치워버리고 호노카를 설레게 하고 있었다. “와, 예쁘다.” 그녀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어라이즈의 모습이 큰 건물의 대형 모니터에서 나타났다. 그곳의 그녀들은 프로로서의 전향을 알리며 무대에서 신곡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부럽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