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가웠던 여름날의, 따뜻했던 겨울까지] 의 외전입니다.
본편을 먼저 감상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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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미, 미오루.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야. CCTV도 없고, 응?”
12월 24일의 크리스마스이브.
사람 한명 돌아다니지도 않는 쓸쓸한 새벽의 횡단보도 위엔, 가만히 멈춰있는 승용차 한 대와 쓰러진 여자,
그리고 황급히 차에서 나오는 두 사람이 보인다.
쓰러진 여자는 살려달라는 비명 한번 조차도 지르지 못한 채, 머리와 팔에서 흥건하게 뜨거운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후미코! 이 사람들……”
“시끄러워! 이런 새벽에 길 건너는게 잘못인거야! 적당히 무시하고 오면 되는 거라고!”
“아, 알았어. 누가 보기 전에 풀숲에 치워둘게.”
“그래. 난 바퀴에 피 닦고 있을 테니까.”
미오루는 예상 외로 내 몸이 꽤 무거운지, 다리를 바닥에 질질 끌고 나를 주변 공원의 풀숲 쪽에 던져버렸다.
차가운 도로에, 내 뜨거운 피의 궤적이 그려졌다. 공원의 풀숲 역시, 내 삶의 흔적이 남았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겠지.
이곳은 아무리 날이 밝아도 사람들이 한두 명 겨우 찾아올까 싶은 버려진 공원인걸.
실제로 나라에서도 공원을 허물고 아파트 단지를 새로 만들자는 판정을 지은 장소이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타고 정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도망쳐버렸다.
그렇게 나는 온갖 이상한 벌레가 돌아다니는, 정리되지 않은 무성한 풀밭에 버려졌다.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을 테고,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 한들 시간이 지나면 곧 썩어 문드러진 몸이 되어버려서
괴상한 악취가 맴돌기 전까지는 그저 행방불명 정도로 판명하고 경찰이 수사를 시작해주겠지.
이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주위의 냄새라고는 피비린내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어째서 새벽에 내가 이곳을 걷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네. 어째서 이곳을 걷고 있었던 걸까.
이젠 풀리지 못할 의문일 뿐인데, 죽기 전에 생각하는 게 겨우 이런 것이라니.
정말로, 한심하다.
나는 사실 전에도 교통사고로 인해서 식물인간 상태였다.
3년 전에는, 은퇴를 준비하던 유명 인기 아이돌로써 착실히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 좋은 아침, 니코쨩. 』
그 동안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내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생명의 끈이 끊어지기 전에 한줄기를 더 내려준 그 사람.
내가 처음 깨어나서 들은 말은 조금 황당하지만 그 오랜 기다림을 느꼈기에 나 역시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지금 나는 눈물을 흘린다. 마지막은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너무 허무한 죽음이라 눈물이 흘러나온다.
이 눈물이 흐르는 피와 함께 내 입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제야 두려움이 내 몸을 침식해온다.
나를 구원해주고, 또 구원받길 기도했던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신경계의 영구적인 손상이었나? 때문에 무대 없이 은퇴를 선언하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인기 아이돌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니시키노종합병원의 자본으로 아이돌 사무소를 차리고, 기적적으로 모두 인기 있는 아이돌이 되어서
사무소는 승승장구.
어쩐지 깨어난 뒤로 인생이 너무 잘 풀린다 싶었다.
죽음의 절벽에서 힘겹게 기어 올라와, 평탄한 평지를 걷다가 또다시 죽음의 낭떠러지로.
이젠 기어오를 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신을 잃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뒤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시간을 가늠할 길이 없는 차갑고 적막한 공원의 자그마한 공간에서, 나는 죽어간다.
잠깐, 내가 어째서 ‘생각’이란걸 할 수 있는 거지?
깜깜하던 눈앞에 정말 아름다운 붉은색 빛을 뿜어내는 생물체 한 마리가 날아들어 왔다.
“하. 어째서 두 명 다 자신의 목숨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걸까.”
나는 이 녀석의 대답에 답해줄 수 없다. 그야 나는 이미 죽어버린 몸과도 같으니까.
정신을 잃는다는 건, 이미 몸에서 허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뜻하니까.
게다가 이 녀석
은 분명 죽기 전에 내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깨비 같은 존재겠지. 대답해줄 가치조차 없어.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의 요정이야. 죽어가는 너에게서 살려달라는 소원을 받으러 왔지.
근데 상태가 좀 말이 아니네.”
나의 살려달라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요정은 그 작은 몸으로 날아올라 나를 이리저리 돌면서 살펴본다.
영롱하게 빛나는 요정의 몸은, 한 손으로 쥐면 그 틈새로 새어나오는 빛이 정말 탐스러울 것 같았다.
어째서 크리스마스 ‘이브’의 요정인걸까? 그냥 크리스마스였다면 좀 더 현실성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 요정이 나타남과 동시에 아득하게 멀어져 가던 정신이 그대로 딱 멈춰버렸다.
마치 낭떠러지로 떨어지던 나를 밧줄로 묶어 고정시킨 듯한, 그런 느낌.
솔직히 이대로 있다간 과다출혈로 죽는 건 아닐까 싶다.
나를 구원해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 선물로 건네줄 그녀와 딱 맞는 붉은색 목도리도 전부 완성시켜놨는데, 죽어버린다.
이 커다란 지구에 있어 한 사람의 죽음은 별거 아니겠지만, 죽어가는 한 사람은
커다란 지구만큼의 마음을 잃어감으로써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그 두려움이 죽음을 가속시킨다. 나를 고정시킨 밧줄에 불을 지른다.
죽음을 받아들이기 싫다는 두려움이, 오히려 죽음을 향한 지름길이 되어버린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요정이 나타나는 것은 죽기 싫다는 내 두려움이 죽음을 막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방패 같은 것이 아닐까?
죽기 싫어.
죽음 자체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런 허무한 죽음으로 내 인생을 끝마치긴 싫었다.
무섭다.
그녀가 외로이 함께했던 3년을, 아직 나로 하여금 채워주지 못했는데.
이젠 둘이서 영원히 함께 라고 약속했었는데.
나에게 한 번 더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그녀에게
그런 간단한 약속조차 지켜주지 못했는데.
어쩔 수 없이 끝을 내야한다.
미안해.
차라리 그때, 확실히 죽어버렸다면 미련 없이 그냥 끝이었는데 말이야.
나는 체념했다.
이제 나에게서 살려달라는 말이 나올 리가 없다.
희망은 버렸다.
저 붉은 빛뭉치는 빨리 사라지지 않고 뭐하는 걸까.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 거야? 분명 포기했을 터이다.
그런데, 이 망할 입술이 멋대로 움직인다.
“사, 살려…….”
“알아들을 수 없는걸.”
나는 입술에 들어가지도 않는 힘을 줘본다.
하지만 꿋꿋하게 활동하는 목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주, 세요…….”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런 말 해봤자 소용없는데. 마음 어디선가 죽기 싫다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는걸까.
입 안으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이 뒤섞인 핏줄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살고 싶다.
“살, 살려, 사…….”
그녀와 조금 더, 그래 조금만 더.
그렇지. 떠나는 기념으로 마지막 작별 선물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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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일어나세요! 새끼가 빨리 퇴근해야하는데 쳐 자고, 제기랄!”
“…방금 일어났다. 뭐라고 했냐 너.”
“그룹 ‘스니쟈-’의 크리스마스 앨범, 포스트카드에 싸인 되있는걸로 바꾼다는데, 이미 생산이 끝나버려서…….”
“그럼 오프라인 샵에 애들 한명씩 대기시켜서 즉석에서 사인해 준다고 해. 그리고 너도 이제 퇴근해.”
나는 눈을 비비고 스마트폰을 킨 뒤, 시계의 시간을 한번 봤다.
[ 12월 24일 / 10 : 47 PM ]
정말 이상한 꿈을 꿔버렸다.
내가 차에 치여 버려서는, 공원에서 한심하게 죽어버리는 꿈.
그런데 이게 방금 전 일처럼 너무나도 생생해서, 믿기 싫지만 한번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아마도 내가 죽었던 공원은 사무소에서 꽤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주위에 편의점 하나 세워진 적 없는 생소한 공간이다.
애초에 사무소를 세울 때 주변에 뭐가 있나 딱 한번 둘러본 장소인데,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나는 옷걸이에 걸어져있는 두꺼운 코트를 입고, 엘리베이터를 타서 1층으로 도착했다.
소식을 들었는지 황급하게 뛰어오는 그룹 ‘스니쟈-’의 리더.
리더는 멤버들끼리의 즐거운 고깃집 점령으로 연휴를 보내야 한다고 들먹이며 내게 사인회를 취소해 달라고
엄청나게 돌려서 말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대충 대답해준다.
“그럼 그 고깃집을 내가 쏠 테니까, 끝나면 바로 가서 제일 비싼 거만 시켜먹던가 해.”
내가 말한걸 제대로 들었는지, 입을 반쯤 벌리고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본다. 아마 너무 어이없는 내 발언에 놀란것일테다.
나는 저 한마디를 남기고 밖을 뛰쳐나왔다.
차로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지만,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걸어서 가기로 한다.
걸어서 20분이지만, 이 상태로 계속 뛴다면 10분정도는 단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에 빠져 뛴다는 것을 잊은 채로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 꿈속에서 봤던 붉은빛 요정이 내 얼굴을 가로막는다.
“잠깐, 아직 시체를 치우지 못했으니까 가지마. 엄청 징그럽다고?”
요정은 이렇게 말하고선 내 눈꺼풀을 쿡쿡 찔러 자동으로 눈을 감게 만든다.
젠장. 우주 No.1 아이돌이었던 니코니-의 단련된 몸이라 그런가, 너무 똑똑하잖아.
“내 동료들이 일을 잘 못하거든.
그치만 팔이랑 다리가 엄청나게 꺾여서는, 생각만 해도 징그러……. ”
그녀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내 바램이 만들어낸 허깨비가 아닌, 진짜 크리스마스 ‘이브’의 요정.
이 기적 같은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나는 몸에서 피가 뚝뚝 흘러나오고 팔과 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있는 나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역시 생각만 해도 징그럽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법했다.
정말로, 나는 죽은 뒤에 깔끔하게 살아났다. 이번에 나를 구원해준건, 저 괴상한 빛의 생명체.
나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했는데,
“계약은 12월 25일 오후 11시 59분. 즉, 내일까지야. 난 크리스마스 ‘이브’의 요정이라 힘이 조금 약하거든.”
“아니, 잠깐 그럼 그 뒤로는 내가 다시 죽는다는 소리야?”
“응. 죽고 난 뒤에는 소원을 빈 사람의 영혼을 회수해가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랬다. 이 녀석은 요정이라고 부르기에도 조금 애매한 녀석이었다.
소원을 빈 대가로 영혼을 가져가는, 무슨 만화책에 나오는 악마 같은 존재.
나는 어이없는 요정의 말을 끊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솔직히 그 상황에서 누가 살려달라고 안하겠어! 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와가지고 살려달라는 소원을 받으러 왔다고 하면, 당연히 살려달라고 하지!”
“어라, 근데 살려달라고는 했으니까 계약한 거지.
어쨌든, 11시 59분이 되기 전에 죽었던 장소로 다시 돌아가서 그대로 누워있어야해.
그러면 신체는 녹아 사라지고, 원래 있던 시체가 그 자리에 나타날 거야.”
죽는 것도 셀프로 가서 죽어야한다. 조금 가혹해져 버린 내 인생.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이틀도 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참담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원래 죽었어야할 나로서는 금보다 귀중한 시간이 아닐까.
내가 이렇게 침착한 이유를 자문자답 해보자면, 나는 아직 죽지 않았고, 그렇기에 슬퍼하긴 이르다.
또한, 조금 낮은 확률이겠지만 12월 26일에 내가 멀쩡히 살아있을수도 있다.
눈앞에 실제로 소원을 빌었던 요정이 있으니, 이게 꿈속의 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현실일 가능성이 조금 클 뿐이지, 꿈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일.
나는 발걸음을 옮겨 주차장으로 향했다.
몇 달 전 까지는 마키쨩의 자동차로 출퇴근했었지만,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서 마키쨩의 도움으로 운전면허를 딸 수 있었다.
물론 이게 끝이다. 반영구적인 손상을 입었기에 더 이상 내 몸은 회복되지 않을 것이며, 만일을 대비해서
조금 비싸더라도 에어백이 매우 잘 작동하는 자동차를 샀다.
후회는 없다. 어차피 은퇴할 예정이었고, 살아가는데 에는 별 지장 없었으니까…….
마키쨩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은 바로 직접 만든 목도리. 어제 미리 써둔 크리스마스카드도 함께 꽂아둘 예정이다.
저번 년도에는 내 상태가 매우 심각했으므로 서로 크리스마스선물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렇게, 내 생애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하러 나는 자동차에 올라탔다.
문을 닫으려 하자, 나를 쫒아오던 붉은빛의 요정이 순식간에 차 안으로 들어온다.
이렇게 보니까 조금 귀여운걸.
겨울에는 시동을 키고, 몇 분 기다린다. 마키쨩이 그렇게 가르쳐줬는데, 아마도 엔진이 얼었을까봐 녹이는 것이겠지?
언젠가 물어봐야겠다. 그래봤자 내일이 지나기 전 이겠지만.
응. 이건 조금 슬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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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빛의 요정과 함께 무사히 집에 도착하고,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 12월 24일 / 11 : 52 PM ]
언제나 응급환자가 판을 치는 병원의 원장인 마키쨩이 잠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어쩌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설마 오늘도 술 같은거 먹고 돌아오려나?
나는 반신반의하며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비밀번호인 787174는 기분 좋게 술에 취했던 나와 마키쨩이 만든 조금 짜증나는 숫자로 이루어져있다.
71,74라니 역시 지금 생각해도 조금 짜증나네.
문이 열리고, 현관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그녀의 신발이 놓여 있다. 일단 집에는 와있다는 소리구나.
만약 아직 잠들지 않았다면 목도리를 직접 목에다 감아주고, 편지대신 말로 전해줘야지.
코트를 벗고 소파에 올려놓는다. 조금 있다가 옷걸이에 다시 걸어놓을 생각이다.
혹시 밥은 먹었으려나 싶어서 부엌 쪽으로 가 식탁을 봤더니 웬 귀여운 핑크색 목도리와 찢어놓은 메모장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미리 와서 자고 있구나.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둘 다 자지 못할 뻔 했다. 아쉽네…….
잠깐, 뭐가 아쉽다는 건데 야자와 니코! 하여간 정말 변태라니까 마키쨩은.
목도리를 한번 목에 감아본다. 좋은 향기가 풍겨서 기분이 좋다. 욕실에 들어가 전신거울을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포즈를 잡아본다.
‘목도리랑 앞치마만’ 이라니, 어떻게 생각해도 앞치마부터가 너무 야한 것 같은데.
일단 부탁이니까 들어줘야할것같다.
내가 들어주는, 마지막 부탁일 테니까.
목도리가 꽤 긴 것 같으니, 텅 비어서 훤히 보일 내 뒷부분은 이렇게 가리면 되겠지.
자세히 보니 조금 털이 삐져나온 부분도 있고, 미숙한 티가 난다. 처음 만든 것 치고는 잘 만들었다고 봐야할까.
목도리를 두른 채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여쁜 붉은 머리 아가씨가 침대 위에서 조용히 잠들어있었다.
가까이 가니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내 귀를 자극한다.
“숨소리를 듣고 흥분하다니, 인간은 이해할 수 없어.”
“조, 조용히해! 흥분한적 없거든!”
요정의 말투는 왠지 재수가 없는 느낌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처음부터 멋대로 소원을 들어준다한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날 살려준 은인이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맞춰서 몸을 덮은 이불이 약간씩 올라갔다 내려간다.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증거 중 하나인 호흡, 그 호흡을 할 수 있는 시간조차 내게 얼마 남지 않았다.
아니지, 생각하지 마.
지금 이 순간을 보자.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성이 내 앞에 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한 없이 부드러운 붉은 머리카락에서는 나와 똑같은 샴푸 냄새가 날 터인데 느낌이 사뭇 다르다.
매끈한 피부는 나보다 하얗지는 않아도 정말 예뻐서, 끌어안아버리고 싶다.
감상을 끝내고, 옆에 있는 책상 위의 보기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영어로된 의학 논문들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이런걸 도대체 어떻게 읽고 사는 걸까. 역시 내 애인이라 그런지 존경스럽다.
정돈된 책상 위에, 열심히 만든 목도리를 놓고, 그녀가 했던 것처럼 카드를 끼워둔다.
임무를 완수한 나는 목도리를 잘 접어서 싱크대 옆에 올려두고, 옷을 벗은 뒤 욕실로 들어간다. 그녀와 똑같은 냄새가 나는 샴푸로 머리를 감고, 똑같은 냄새가 나는 바디워시로 몸을 씻는다. 똑같은 향기가 나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머리를 말린다.
이렇게 씻고 일하러 갈 때면 그녀가 항상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엄청 졸라서 사버린 커플 잠옷을 입고, 그녀의 옆에 눕는다. 그리고선 슬며시 양 팔로 꼬옥 안는다.
“니코....쨩.”
“응. 깨워서 미안해. 다시 자자…….”
내가 눈을 떴을 때에는, 엄청 초조한 하루가 시작되어있겠지.
그리고 내가 눈을 감았을 때에는, 초조했던 하루가 끝나있겠지.
똑똑한 내 신체는 눈꺼풀에 빛이 감지되자 조금씩 반응하며 뇌를 깨운다.
머리맡에 두었던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한다.
[ 12월 25일 / 6 : 07 AM ]
내가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눈을 감은 적도 없는데 어느새 눈이 떠지는 마법 같은 행동.
그녀에게 선사할 마지막 아침밥을 준비하기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오늘 아침은, 늘 그렇듯 평범하고 평범한 된장찌개. 조금 더 힘내서 만들어볼까 싶었지만 웬일이야- 라는 소리는
왠지 듣기 싫었다.
냉장고에서 된장찌개 재료들을 모두 꺼낸 뒤, 마지막에 적혀있던 부탁을 들어줘야 할지 망설였다.
그렇게 몇 분간 앉아서 고민만 하던 나에게, 어제 보았던 붉은빛의 요정이 머리위에 풀썩 앉았다.
역시 꿈이 아니었구나. 전부 꿈이길 바랐지만 내게 놓인 현실이 너무 가혹했다.
“비켜.”
나는 머리위에 있는 요정을 손으로 가볍게 밀쳐냈다. 생각보다 요정은 가벼워서, 빠른 속도로 날아가 벽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혹시 죽은 것은 아닐까 싶어서 다가갔더니 뭐하는 짓이냐며 내게 화를 냈다. 하긴 요정이 이정도로 죽을 리는 없겠지.
아마도 고통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키쨩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잠옷을 전부 벗었다. 알몸이 훤히 들어나서 그런지 상당히 추웠다.
“인간? 아래도 벗어야지!”
요정을 손으로 쥐어 잡고 바닥에 내리쳤다. 어차피 고통을 느끼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선 지금 벗을 예정이었다고 말한 뒤 속옷도 벗어던졌다.
나는 혹시나 마키쨩이 깨어날까 빠르게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옆에 준비해놓은 목도리를 착용한다.
최소한으로 감고, 최대한으로 늘려서 등 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간신히 엉덩이가 가려지는 길이라 엄청나게 부끄럽다.
이제 재료를 손질해야겠지.
물을 냄비에 담아 끓이고, 감자의 껍질을 벗긴다. 껍질이 벗겨진 감자를 사랑의 힘을 담아서 조각내 썰고, 펄펄 끓는 물속에 다이빙 시킨다.
애호박과 양파를 먹기 좋은 크기로 알맞게 썰어서 준비해놓는다. 행복한 표정으로 기쁘게 먹을 그녀를 생각하니,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살랑 살랑 춤을 추게 된다. 아이돌 활동의 영향인가.
그렇게 된장을 한 스푼, 남은 야채도 전부 입수 시키니 마키쨩이 방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헉, 하는 짧은 그녀의 단말마가 보글거리며 끓는 된장찌개 소리를 비집고 귀에 박혔다.
“니, 니코쨩?! 붸, 붸에에…….”
당황하면서도 부끄러워하고, 사실 속으로는 엄청 좋아하고 있을 듯한 마키쨩은 언제나 귀엽다.
내가 그런 마키쨩에게 반해서, 이렇게 같이 살고 있는걸.
“저기, 그릇 꺼내놨으니까 밥좀 퍼서 갖다놓고 앉아있어.”
“붸에에, 알, 알았어.”
그녀는 수저와 젓가락도 함께 놔주는 센스를 갖췄다. 식탁 의자에 얌전히 앉아있는 그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여담이지만, 사실 마키쨩은 저 나이 먹고서도 산타를 믿고있다.
『 어렸을 때에는 산타가 정말로 선물을 제대로 가져다줘.
하지만 우리가 자라면서 의문을 가져버리게 되는거지. 정말 산타는 존재하는걸까? 하고.
그렇게 존재를 믿지 않는 순간부터,
더 이상 이 아이는 어리지 않구나- 하면서 영영 찾아오지 않게 되는거야. 』
『 그러면 당연히 누구라도 산타가 없다고 생각하잖아! 』
『 그렇지. 산타는 ‘믿음’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존재야. 꽁꽁 얼어있던 믿음이 녹아 사라진다면,
자연스레 그 사람 곁을 떠나게 되어있어. 그래서 아무도 산타를 믿지 않는 것이고.』
『 니코쨩은 어째서 그렇게 산타를 잘 알고있는거야? 부러워. 』
『 읏. 그야 나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직접 산타의 실물을 숨어서 본적도 있다고.
애초에 산타가 없다면, 산타복장이라던가 어떻게 만든 건데? 』
『 그치! 산타는 정말로 존재한다고! 역시 니코쨩! 』
물론, 그 주위에 있던 나 포함한 친구들이 한 몫 했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자신이 산타를 믿는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않는다. 말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고 말해줬으니까.
내가 처음 고백했을 때, ‘이제 마키쨩에겐 산타가 찾아오지 않을 거야. 대신 산타니코쨩이 찾아올 테니까-’ 같은
조금 오글거리는 말도 했었지.
그래서인지 마키쨩은 저 ‘산타니코쨩’ 이라는 단어를 매우 좋아한다. 산타할아버지 대신 찾아오는 거라 그런가.
내가 깨어난 뒤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의 첫 번째 산타니코쨩.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맞이할 산타니코쨩이기도 하다.
나는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국자로 떠서 한번 맛을 본다. 오늘따라 맛있게 잘 끓여진 것 같다.
‘오늘따라’ 라는 말은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듣기도 싫은데 자연스레 직접 말해버렸다.
마키쨩은 벌떡 일어나서 냉장고의 반찬을 꺼낸다. 은근슬쩍 이쪽을 보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정말 귀엽다니까.
나는 된장찌개의 불을 끈 뒤 국자를 물로 씻어 국그릇에 찌개를 예쁘게 담는다.
양 손에 능숙하게 뜨거운 국그릇을 들고, 자리에 앉아 식탁에 천천히 내려놓는다. 마키쨩은 내가 카드에 썼던대로 붉은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어느 때와 같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일하러가?”
“어? 아, 응. 원래는 쉬려고 했는데, 미안…….”
“괜찮아. 니코도 할 일이 많아서. 그럼 저녁식사는 10시에 레스토랑인거다?”
“10시, 알았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갈게. 내가 사무소 앞으로 마중나갈테니까.”
“으음- 고마워. 빨리 밥이나 먹자구!”
그나저나, 어느새 마키쨩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저 붉은빛의 요정이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
내 눈에만 보이고, 내 손에만 느껴지는 존재인지 그녀는 자신의 머리가 그렇게 헝클어졌냐며 손으로 이리저리 머리를 정돈한다. 부스스한 머리가 귀여웠는데…….
그녀는 내가 해준 아침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그 어떤 고급 음식점의 음식보다 맛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칭찬은 거의 맨날 듣는 말이지만, ‘오늘따라’ 칭찬이 너무 과한걸.
“응. 고마워. 나도 내가 만든 건 정말 맛있다고 생각해♪. ‘오늘따라’ 더 맛있잖아!”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걸까.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별로 특별하지 않게 지내고 싶었다.
어느 때와 같이, 평소와 다름없이. 오늘만의 좌우명이었는데 역시 좌우명은 폼으로 만드는 거라니까.
마키쨩은 식사를 끝낸 뒤 자신의 그릇은 물론 내 밥그릇까지 전부 가져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설거지는 항상 내가 하겠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말려도 이것만큼은 그녀 자신이 해야겠다고 발광한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해주고 싶다. 그녀는 설거지를 매우 못하므로 내가 하지 않으면 세균이 득실득실한 내일 아침을 먹어야 할 테니까.
내가 없는 대신 세균과 함께 아침을 먹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다. 물론 세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있는 게 마키쨩의 마음을 채워줄수 있을 테니까.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은 집어치우고, 나는 마키쨩의 손목을 잡고 내 어깨에 올려놓았다.
모처럼 이렇게 원하는 복장까지 해줬는데,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해주면 안 되냐고 논리적으로 반박하였더니,
그녀도 한숨을 쉬며 내 목도리를 쭉 잡아당기더니 목에 감긴 목도리를 전부 풀어버렸다.
설거지를 끝내면 자신의 머리를 감겨달라며 웬일인지 어리광을 잔뜩 부린다.
이 녀석은, 내가 오늘 죽을 것 이라는 건 알고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이러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편에 얼려놨던 모든 두려움에 불이 뿜어져 나와 전부 녹아버릴것같은 느낌이 든다.
그녀에게는 오늘이 어느 때와 다름없는 행복한 일상이겠지만, 나에게는 곧 죽음이라는 손길이 내 목숨을 앗아갈까 두꺼운 얼음벽으로 공포를 두르고 두려움을 차단하는 조금 무서운 하루일 텐데.
설거지를 끝낸 뒤, 나는 앞치마를 마저 벗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키쨩과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손을 적시는 따뜻한 물은 마음속의 얼음벽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다소 모순적인 표현이겠지만, 나는 그저 내 마음에서 느껴지는 대로 생각할 뿐이니까.
혹시 샴푸가 눈에 들어갈까 눈을 꾹 감고 마냥 행복해 보이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내일 아침에도 머리를 감겨주고 싶은 마음이 목을 졸라맨다.
이것이 절망으로 변했을 때, 나는 끝이 나겠지.
그 누구도 영원히 찾아올 수 없는, 아무도 돌아온 적 없는 죽음의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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