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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단편

그 무엇보다 달콤한

그 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뜬 순간 노조미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가쁘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호흡, 어째서인지 빙글빙글 도는 듯한 시야. 평소보다도 훨씬 더 뜨거운데도 이상하리만치 싸늘하게 떨려오는 몸. 참으려고 했지만, 목을 타고 올라오는 간지러운 느낌에 밭은 기침을 내뱉는다. 

"콜록!"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감기였다. 노조미는 한 팔로 침대를 짚어 몸을 지탱하며 일어서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질 않는지 이내 침대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혼자 살 때 아픈 것만큼 서러운 것도 없는데,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며 노조미는 간신히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스마트폰을 집어들었다. 도저히 학교를 갈 몸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하기만 했다. 

"아…, 토요일…." 

다행히도 학교는 쉬는 날이었다. 그 이전에 이미 시간은 등교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지만. 감기 탓일까, 알람소리도 듣지 못하고 자고 있었나보다. 

"뮤즈…, 콜록! 연습이…." 

스케쥴 관리 어플리케이션을 열어 일정을 확인한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오늘 예정에 아무런 글자도 없이 새하얗기만한 것을 확인하고 노조미는 안심한 듯 몸에서 힘을 빼고 침대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손에서 스마트폰이 미끄러져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시 주워들 힘이라고는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약을 먹자니 식욕도 없고, 식재료도 남아있지 않았다. 생각을 이어갈 기력조차 모자란 건지, 노조미의 의식은 이내 깊숙히 가라앉았다. 




"하아, 하아."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노조미의 방이 있는 빌라 복도에 에리의 모습이 보였다. 집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이제 겨울이 다가오는 쌀쌀한 날씨인데도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이렇게 노조미의 집에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 오전부터 몇 번이고 노조미에게 전화며 메세지를 남겼음에도 노조미가 단 한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던 탓이다. 
문 앞에 이르러, 에리는 숨을 몰아쉬며 주머니를 뒤져 노조미에게서 받은 열쇠를 꺼냈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손이 떨려 한 번 열쇠를 떨어뜨리고, 열쇠구멍에 제대로 열쇠를 맞추지 못하고 미끄러뜨리기를 두어 번. 간신히 문을 열고 에리는 방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신발을 벗으며 슬쩍 보니, 노조미의 신발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순간 에리의 뇌리를 스쳤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인기척이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에리는 복도를 지나 거실을 거쳐, 노조미의 침실로 향했다. 닫혀있는 문을 소리가 나지않도록 조심스레 열자, 침대 위에 누워있는 인영이 보였다. 그냥 자고있는 것 뿐이었구나, 하며 안심하고 에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휴일이라지만 노조미 치고는 과도한 늦잠이라고 생각하며 침대로 다가가던 에리는, 침대에 누워있는 노조미의 모습을 보고는 황급히 닫혀있던 커튼을 젖혔다. 

간혹 신음을 흘리며, 옅은 홍조를 띈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노조미. 햇빛이 들어오자 눈살을 찌푸렸지만,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에리가 이불을 살짝 젖히자, 어찌나 땀을 흘렸는지 노조미가 입은 잠옷은 이미 완전히 젖어 축축한 상태였다. 겉으로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을만큼 노조미는 괴로워 보였다. 

에리는 노조미를 깨우려다 멈칫했다. 보아하니 감기에 걸린듯한데 괜히 깨우기보단 일어나기 전까지 푹 쉬게 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다시 이불을 덮어주고 침실을 나가려는데 에리의 발에 무엇인가가 걸려 주워들어보니 노조미의 스마트폰이었다. 액정을 켜 보니 에리가 걸었던 부재중 전화며 메시지가 잔뜩 쌓여있고, 그 옆에 '무음'을 나타내는 작은 아이콘이 보였다. 과연, 무음 상태라서 노조미가 듣지 못했나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리는 조용히 침실을 나와, 주방으로 향해 냉장고를 열고 안을 살폈다. 

"역시…." 

텅 빈 냉장고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리는 중얼거렸다. 자취생활을 시작한지 벌써 2년이 넘는 주제에 요리에는 영 젬병인 노조미였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식재료라도 사 와야겠다 싶어 에리는 노조미의 방을 나섰다. 




제일 처음 느껴진 감각은 달칵, 하고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깨어나기 시작한 노조미의 의식은 자신이 입고 있는 잠옷이 땀에 젖어 축축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느꼈고, 고소한 향기가 코로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의외의 모습이 눈 앞에 보였다. 

"어머, 일어났어?" 

"에리치…?" 

한순간 노조미는 꿈을 꾸고 있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떠도 에리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불어 에리가 들고 있는 그릇에서 풍겨오는 냄새도, 이마를 짚어오는 에리의 따스한 손길도. 

"열은 좀 내렸나보네. 약 아직 안 먹었지? 식욕은 어때? 죽이라면 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아, 응…. 근데 에리치, 어떻게…?" 

잠이 덜 깬건지, 아니면 감기 때문에 머리회전이 둔해진 건지 노조미는 의외로 에리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에리는 쟁반을 침대 위에 올려두고는 노조미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몇 번이고 전화해도 받질 않으니까. 걱정되서 와 봤어." 

"에, 참말로? 하나두 못들었는디…." 

화면을 보며 못 믿겠다는 듯 노조미는 중얼거렸다. 그러다 이윽고 무음 상태인 아이콘을 보고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 무음 상태로 돌려놓았지? 

"아, 콜록! 아아…." 

침대에서 떨어뜨릴 때 버튼이 눌렸나 보다. 기억이 애매하지만 아마도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노조미는 입을 열었다. 

"고맙구마, 에리치." 

"정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전화도 문자도 안 받지, 와보니 땀은 뻘뻘 흘리고 있지, 죽이라도 만들려고 했더니 냉장고는 텅텅 비었지." 

"에헤헤…." 

한 숨 자고나니 조금 기운을 차렸는지 멋쩍게 웃는 노조미를 흘겨보다, 에리는 죽 그릇과 숟가락을 들었다. 죽을 조금 떠서 후후 불며 식히고는, 숟가락을 노조미에게 내밀며. 

"자, 아-앙." 

"에, 콜록! 에리치?!" 

노조미는 당황해 에리의 이름을 불렀지만, 에리는 못 들은 체 하며 숟가락을 내밀고만 있을 뿐이었다. 숟가락과 에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노조미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기, 에리치? 혼자 먹을 수 있는디…." 

"걱정만 시키는 나쁜 아이에게 주는 벌입니다." 

짐짓 화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팩 돌리며 에리는 말했다. 노조미는 조금 고민하다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나 에리가 자신을 걱정해 준 것이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아-앙." 

노조미가 입을 벌리자, 그제서야 에리는 살짝 미소짓고는 숟가락을 움직여 노조미에게 죽을 먹여주었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노조미는 얌전히 죽을 받아먹었다. 에리가 만든 죽은 그 어떤 음식보다도 달콤한 느낌이 들었다. 




노조미가 죽을 모두 먹고, 약을 먹고, 땀에 젖은 몸을 닦고 새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눕기까지 약 1시간. 목까지 이불을 덮어쓴 채, 노조미는 옆에 앉은 에리에게 말을 걸었다. 

"참말로 고맙데이, 에리치." 

"뭘 이정도 가지고 그래." 

에리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슬쩍 시간을 보니 벌써 저녁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묵고 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집에 연락을 하려 핸드폰을 꺼내드는데, 노조미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근데 에리치, 내한테 무슨 용무 있던거 아이가?" 

"응? 아, 아아…. 내일이 린 생일이니까, 연습 끝나고 작은 생일 축하라도 해주자고 생각해서 연락했었어." 

"아아…." 

그러고보니 그랬구나, 노조미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 린의 생일이라는 것은, 오늘이 10월의 마지막 날, 즉, 할로윈이라는 것이 된다. 거리는 한창 할로윈 분위기에 가득 차 있겠지. 괜히 에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노조미는 에리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데이, 에리치. 이런 날에 간병만 하게 만들고…." 

괜찮다고 말하려다, 에리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날이라니 무슨 날이지, 하고 에리는 생각하다, 그제서야 오늘이 할로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에리는 조금 짓궃은 미소를 지었다. 마침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시각. 할로윈에 더없이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그러네, 노조미. 그럼 Trick or treat." 

"에? 에?" 

웃으며 손을 내미는 에리의 모습에 노조미는 당황했다. 하루 종일 아파서 누워만 있었는데 과자며 사탕을 준비했을 리가 없었다. 에리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해 당혹해하는 노조미에게, 에리는 더욱 짙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흐응, 과자는 없는 것 같네. 그럼 Trick이지?" 

그렇게 말하며, 에리는 노조미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사실 과자같은 것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달콤할 것이 분명한, 그야말로 마녀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매력적인 것이 에리의 눈앞에 있었으니까. 

가볍게 스치듯, 에리의 입술이 노조미의 입술에 겹쳐졌다. 감기 탓인지 메마른 노조미의 입술을 적시듯, 마치 어린아이가 사탕을 핥듯 에리는 노조미의 입술을 맛보았다. 실컷 노조미의 입술을 탐닉한 후 에리가 노조미에게서 떨어질 때까지, 너무 놀란 나머지 노조미는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잘 먹었습니다." 

장난스레 말하는 에리의 모습에, 멍하니 에리를 바라보던 노조미의 눈동자에 간신히 초점이 돌아왔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이미 감기 탓에 옅은 홍조를 띠고 있던 노조미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붉어지고, 마침내. 

"에, 에리치 바보!" 

몸을 일으키고는 베개를 집어들어 에리에게 마구 휘두르기 시작한다. 팔로 막으면서 미안 미안, 하고 사과하는 에리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만큼 즐거움이 가득했다. 조금 휘두르다 지쳤는지 이내 노조미는 움직임을 멈추었고, 새빨개진 얼굴로 에리를 노려보다 휙 고개를 돌리며 에리의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에리치따위 모른데이! 

화난 마녀님의 마음을 풀어주려면 조금 고생할 것 같다. 
에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노조미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물론, 그 다음날 에리가 감기에 걸려 린의 생일파티 때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만 했던 것은 또 다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