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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단편

취중진담

 술기운에 머리가 어지럽다. 눈앞에 시야가 일렁이고 속은 메스껍다. 


 한쪽 발을 들어 앞으로 내딛고 넘어지듯 다시 반대쪽 발을 들어 앞으로 내딛는다. 결과적으로 비틀거리며 걷는 모양이 된다.


 울렁, 갑자기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을 싸맨다. 목을 타고 올라오는 토기를 억지로 가라앉힌다. 가슴을 두드리며 숨을 참아 가슴을 진정시킨다.


 “윽.......!”


 잠시 그러고 있자니 간신히 속이 진정되었다.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잠시 벽에 몸을 기댔다.


 ‘너무 많이 마셨나.’


 나는 술이 약한 편이다. 그것도 꽤 심하게 약하다. 술을 마실 때마다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이 되고, 또 그래서 술을 안 좋아한다.


 그런 내가 술을 마시게 된 건 왜일까. 사실 나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그런 기분이었고, 쓰라린 속을 잊기 위해 더 쓴 것을 찾은 것일 뿐이다.


 “린.”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본다.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절반의 그리움, 그리고 절반의 후회. 


 잊고 살았을 것이 분명한 그 아이의 이름이 나온 이유. 그건 내가 술을 마시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는 단순히 하나요와 저녁을 먹는 정도였다.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한 탓에 만날 기회가 줄어든 것에 최근에는 서로 과제니, 강의니 하며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번에 알게 된 맛집(기본적으로 정식이 맛있는)에서 만났다. 내가 늦게 왔고 하나요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내게 하나요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줬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언제나 보던 그 웃음에 나도 미소로 화답하고 하나요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하나요는 늘 그렇듯 정식 세트를 주문했고 나도 하나요를 따라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들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언제나 나누던, 시시하면서도 유쾌한 이야기를 했다. 오래간만에 만난 것 때문인지 나도 하나요도 평소보다 들떠서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쌓여있던 이야깃거리도 많았고 말이다. 


 주문했던 정식이 나오고 대화는 더욱 활기를 띄었다. 지금 대학 생활은 어떤가, 어떤 사람과 어떤 일이 있었는가, 앞으로의 문제나 지금 눈앞에 닥친 문제. 때론 불평을 하고, 때로는 서로 웃기도 했다. 즐거웠다.


 시간이 흐르고 대화도 진행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늘 그랬듯 화제는 예전에 같이 활동했던, 스쿨아이돌 뮤즈와 관련된 곳으로 흘러갔다. 그만큼 나와 하나요에게는 뮤즈로서 활동했던 시간이 소중했던 것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옷가게에서 코토리짱을 만났는데 말이야.”


 하나요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전 가을 옷을 사기 위해 들린 옷가게에 마침 코토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둘은 그대로 신주쿠, 하라주쿠 등 번화가를 돌면서 쇼핑을 하고 큰 케이크 뷔페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고 한다. 


 “지금 입은 이 옷도 코토리짱이 골라준 거야.”

 “헤에.......”


 확실히. 눈치 채지 못했지만 평소에 하나요가 주로 입는 옷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평소의 푹신푹신한 옷차림이 약간 세련된 느낌이 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런 거였구나.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훗, 코토리라고 하니까 지난 번 귀국파티가 생각나네.”


 코토리는 올해 미국에서 디자이너 수업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 때 나와 하나요는 물론, 호노카와 우미, 3학년들까지 다 같이 모여 코토리의 귀국파티를 했었다.


 “그 때 호노카가 술을 엄청나게 먹여서 큰일이었어.”

 “정말!”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때 했던 게임에서 내가 자꾸 져버리는 바람에 술을 엄청나게 많이 마셔야 했었다. 


 “나중에는 마키짱 쓰러져서 말이야.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면목없어.”


 나는 씁쓸히 웃음을 지으며 하나요에게 사과했다.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다른 멤버들 말로는 굉장했다고 한다. 안 좋은 쪽으로. 


 하나요는 내 사과를 받고는 ‘아니야, 됐어.’ 하고는 쿡쿡하고 웃었다.


 그러다가 잠깐 하나요가 웃음을 멈추고 내게 눈을 맞췄다. 어쩐지 슬픈 눈으로, 말없이 눈치를 보듯 나를 보았다.


 “? 하나요. 무슨 일이야?”


 나는 그런 하나요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나요는 그런 내 물음에 잠깐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마키짱.”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인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하나요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나 의외의 말이었다. 


 “그 때 마키짱은 몇 번이고 린짱의 이름을 불렀어.”


 하나요는 그 말을 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 나는 놀란 눈을 치켜뜨며 하나요를 응시했다. 입으로 가져가려던 음식을 그대로 멈춘 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린짱의 이름을 불렀어. 마치 찾는 듯이.”

 “.......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거야.”


 나는 아까전의 활기를 띈 목소리를 거두고, 목이 잠긴 것 같은 추궁하는 목소리로 하나요에게 물었다. 분명 나는 지금 눈을 크게 뜨고 하나요를 노려보고 있겠지.


 “미안, 딱히 말할 기회가 없었어. 그 이후로 만난 적도 얼마 없었고.”

 “그럼 말 안하면 되잖ㅇ........”

 “하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린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는 거라면, 린을 용ㅅ.......”

 “됐어.”


 가시돋친 내 대답에 하나요가 하나요답지 않게 다른 사람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리고 열심히,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끊고 한마디로 일축시켰다.


 “나랑 걔는 이제 남이니까.”

 “마키짱........”


 그 말 이후로 하나요와 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치 방금 전의 이야기꽃이 거짓말이기라도 한 듯, 서로 아무런 말을 걸지 않은 채로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사실 먹는 게 먹는 것 같지 않았다. 꽤 먹었다지만 눈앞에는 한가득한 음식이 있었고, 그건 하나요도 마찬가지였다. 


 “....... 하나요. 술 마시고 싶지 않아?”


 나는 하나요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나요는 나랑 달리 술을 좋아한다. 평소에는 호노카랑 같이 마시는 모양이지만 코토리가 귀국한 이후로는 호노카와 의기투합해서 과거 쁘랭땅 멤버끼리 자주 마시러 다니곤 했다.


 나도 하나요도 서로 먼저 이야기를 할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다. 오래간만에 만난 하나요와 이런 분위기에서 헤어지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그러니까, 술을 통해서라도 이런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에? 마키짱은........”

 “아, 괜찮아. 나도 마시고 싶은 기분이니까.”

 “응. 그렇다면 조금만.”


 하나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점원을 불러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하나요는 괜찮겠냐고 다시 한 번 물었지만 나는 있는 힘껏 미소 지으며 하나요에게 괜찮다고 대답했다.


 다행히도 술이 도착하고 건배를 한 후에는 다시 조금씩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다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지금, 하나요와 헤어진 채 늦게 올라온 술기운에 나는 비틀거리며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방금 전 토하는 것을 참아서 그런지 속이 답답했다. 무언가가 명치 한가운데 박혀있는 기분이라 괴로웠다.


 ‘좀 걸을까.’


 벽에 기댄 채로 있었더니 그나마 안정된 기분이었다. 벽에서 떨어져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는 살짝 걸음이 꼬인 정도였지 비틀거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가 어지럽긴 했어도 안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근처 공원을 향해 걸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봤더니 12시 30분 정도. 그렇게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아예 없는 시간도 아니었다. 늦게 퇴근하는 직장인들, 학원으로 늦게 들어오는 학생들 정도가 눈에 들어왔다.


 걷는 동안에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감정은 생각이랑 별개인 건지 괜한 짜증이 들었다. 머리가 아픈 것, 속이 답답한 것, 그리고 모른 척하고 살던 린의 이름을 듣게 된 것.


 “후우.......”


 괜히 그런 이야기를 꺼내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나요도 그래. 이때까지 말하지 않았으면 이번에도 숨겼으면 됐잖아. 술을 마시게 된 것도, 린의 이름이 생각나버린 것도 하나요 때문이야. 


 하지만 그런 되도 않는 짜증은 항상 자괴감으로 끝난다. 


 ‘그래. 하나요도 나랑 린이 이렇게 된 게 보기 힘들었겠지.’


 결국 남는 건 자기한탄. 나는 다시 머리가 아파와 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세게 눌렀다. 


 “린.”


 나는 다시 그 이름을 불렀다. 


 되도록이면 린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잊고 싶을 정도로 린에 대한 감정이 깊었기 때문에.


 린과 나는 연인 사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친하게 지내다가 어떤 계기도 없이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고, 눈치 채보니 연인이 되어 있었다. 고백이랄 것도 없이, 둘만 있는 부실에서 대뜸 린이 ‘나 마키짱이 좋아.’ 라고 한 것을 계기로. 


 연인이 된 후로 더욱 린에게 끌렸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린에게 푹 빠진 것이다. 린이 없는 일상 따위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는 린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꽤나 현실적이었다. 3학년으로 진급을 하여 수험생이 되고, 나는 공부에 매진했다. 누구도 나와 린의 관계를 뭐라 할 수 없도록, 린과의 관계에서 떳떳할 수 있도록. 그렇게 생각하며 공부에 힘썼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린에게는 소홀해졌다. 만나는 빈도도, 놀러다니는 빈도도 줄어들었다. 괜찮다고, 이 1년이 끝나면 린과 항상 함께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었다. 수험 날짜가 가까워 질 수록 나는 린에게 점점 더 소홀해졌다. 린은 그런 내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수험이 끝나고, 나는 원하던 대학의 의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자랑스러워 하시고, 선생님들은 칭찬하셨다. 스스로도 뿌듯했다. 린에게 빨리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서 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린?”

 “마키짱?”


 나는 들뜬 목소리로 급하게 말했다.


 “린. 붙었어.”

 “에?”

 “xx대학 의학부. 합격했다고.”

 “....... 정말!? 마키짱! 축하해!”


 잠깐의 침묵. 그리고 축하의 말. 나를 축하해주는 린의 목소리는 마치 자신이 수험에 합격한 듯 들떠있었다. 린의 축하의 말을 들으며 스스로 뿌듯해하고, 주말에 만날 약속을 잡았다. 린은 기쁜 듯 ‘기대하고 있을게.’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도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어딘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들뜬 마음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약속한 주말이 되었다. 오래간만에 놀러나간다고 생각하고 잔뜩 신경을 써서 나왔다. 린과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려 기다리는 동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약속 장소에 30분 정도 일찍 나갔다.


 린은 약속한 시간보다 5분 정도 빨리 왔다. 많이 기다렸냐고 묻는 린에게 별로 기다리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예전에는 덜렁거리는 탓에 자주 늦던 린이었지만 최근에는 빨리빨리 나온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 웃었다.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전망대에 올라가 도쿄를 한눈에 내려다본다거나, 플라네타륨에서 별자리를 본다거나, 오락실에서 이상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관람차에서 내려다 본 아키하바라의 야경은 환상적이었다.


 몇 달만의 데이트였지만 딱히 새로운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놀았다 일뿐. 하지만 린과 이렇게 손을 맞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오래간만에 잡은 린의 손이 기뻐서 평소보다 몇 배는 즐거웠다. 


 데이트가 끝난 것은 해가 완전히 진 때였다. 그래봐야 한겨울의 해는 그렇게 길지 않으니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로 내가 먼저 말을 하는 형태로 나와 린은 이야기를 하며 집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듯, 툭 하고 내가 린에게 물었다.


 “린. 무슨 일 있어?”


 아무리 들떠 있다고 해도, 점점 어두워지는 린의 얼굴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지막 코스인 관람차에서 부터 지금까지 오는 내도록 점점 린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혹시...... 나랑 같이 있는ㄱ”

 “아,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그냥, 그냥......”


 변명하듯 말하는 린을 보며 나는 린이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걸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다행이네.”


 그래서 나는 웃음을 지으며 린의 손을 잡았다. 


 “뭐해? 빨리 가자.”

 “아.......”


 내가 잡아끌자 린은 앞으로 몇 발짝 내딛었다. 


 “잠깐만 마키짱.”


 그대로 나를 따라오는 줄 알았던 린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키짱에게 할 말이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려 린을 바라봤다. 


 “무슨 말?”

 

 내 물음에 린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어두워졌다가, 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괴로운 표정을 짓고는 크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 유학을 갈까해.”

 “...... 뭐?”


 귀를 의심했다. 방금 내가 들은 게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었다. 


 “자자자, 잠깐만. 뭐? 유학?”

 “응. 아마 이탈리아쪽으로 갈 것 같아.”

 “왜? 어째서?”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쐐기를 박는 말. 어느샌가 나는 따지듯 린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어째서 유학인데?”


 린은 그 질문에 살짝 망설이는 듯 했지만 대답을 했다. 


 “왜 있잖아. 호노카짱네가 수학여행 갔을 때, 패션쇼에 나갔던 거. 그 이후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패션이라던가, 디자인이라던가 관심이 생겨버렸어.”


 대답을 하는 린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때 내가 자신을 깨고 나왔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자신감을 넣어줄 수 있는 일.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버려서. 잡지도 보고, 이것저것 꾸며보기도 하다 보니까 더 하고 싶어져 버린 거 있지.”


 그렇게 말하고 린은 살짝 눈을 피했다.


 “유학은 3학년이 되고 나서 코토리짱이랑 잠시 만났을 때 나왔던 이야기야. 정말 하고 싶다면 유학을 가는 게 어떻겠냐고. 잠재력이 있으니까, 코토리짱을 초대한 선생님에게 말해 보겠다고 했어.”

 “그래서......”


 린은 고개를 들어 스스로도 살짝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응. 마음에 들었나봐. 신선하고 재능이 있다고, 와서 배워볼 생각 없냐고. 그러더라.”


 린은 그렇게 말을 마쳤다. 눈을 다시 내게서 피하며.


 어이가 없었다. 속에서 검은 무언가가 갑자기 타올라서 내 침착함과 이성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거야. 린과 함께 있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나는. 나는 뭐가 되는 거야. 나는 린을 원했는데, 린은 나를 원하지 않는 거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러면 왜 유학 같은 걸? 왜 유학 따윌 가서 내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거야. 아니 왜 나는 그걸 눈치 채지 못했지? 왜? 왜? 왜? 


 속에서 분노, 슬픔, 절망, 후회, 자괴감이 날을 세우고, 서로 부딪치며 내 마음 구석구석까지 찢어 놓았다.


 찰나의 순간 동안, 일련의 그 과정이 마치 영겁의 시간과 같이 흘러갔다. 


 “왜.”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왜, 내게 미리 말을 하지 않은 거야.”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에서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다. 어째서 이 일을 나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았는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잖아. 연인이잖아. 왜. 왜 말 안한 거야.”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갑작스런 충격과 너무 많은 생각에 지쳐서 그냥 내뱉듯 하는 말.


 “대답해줘. 린. 어째서야?”

 “미안.”


 린은 내 질문에 대답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나를 더 화나게 했다.


 “어째서야!!!”


 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봤다. 울 것만 같은 표정이지만 울고 있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꾹 참는 것 같은 표정.


 “됐어.”


 그 표정에 독기가 빠졌다.


 “헤어지자.”


 그렇게 말하고 나는 등을 돌렸다. 린은 나를 잡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길을 걸어 린으로 부터 멀어졌다. 등 뒤에서 린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 듯 했다.


 그 뒤에 나와 린은 마치 남이 된 것처럼 지냈고, 린이 유학을 떠나는 날 까지도 나는 린을 제대로 마주 보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린은 내게 말하려고 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린이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때의 나는 수험에 열중하고 있었던 터라, 린은 그런 나를 배려해 이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하... 아하하.......”


 허탈하게 웃었다. 그냥 말하면 좋았을 텐데. 내게 중요한 건 수험이 아니라 린이었는데. 모든 게 어긋나 있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한 모든 것들이 소중한 사람을 잃게 한다는 것.


 린이 끝까지 나를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기 전의 나는 린이 미워서 만나지 못했다. 미워서 거부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린을 볼 때마다, 이미 남이 된 우리 관계가 괴로워서 거부하게 되었다. 


 작은 일상 하나에서도 린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생각나 괴로웠다. 후회했다. 그럴 때마다 린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시간이 지나서 일상에 이 감정들이 묻히길 바랬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린을 일상에서 떠올리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이렇게 린의 이야기를 듣거나, 술을 마시게 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린이 떠올라 다시 그 때의 이기적인 내가 떠올라 괴로워진다. 그날 마지막에 보았던 린의 슬픈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 미칠 것만 같다.


 ‘지치는 걸.’


 여러 가지 생각으로 지쳐있는 머릿속, 술에 취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어디 잠깐 앉아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공원이 나온다는 사실이 생각나 그쪽으로 가서 쉬자고 생각했다.


 공원은 아무도 없이 한산했다. 시간도 시간이며 이 주변에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는 대충 빈 벤치에 가서 앉았다. 자리에 앉자 피로감과 두통이 밀려왔다. 나는 몸에 힘을 뺀 채로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빛나고 있었다.


 이 주변도 나름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곳인지라 평소에는 그다지 별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도 하늘이 맑아 별이 보였다.


 나는 조용히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완전히 쭉 뻗지는 않고 쫙 핀 손으로 하늘을 완전히 가릴 수 있을 만큼만. 마치 내 손 안에 별들이 다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별을 줍는 것처럼 손을 쥐었다. 당연하지만 별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갔다.


 손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슬펐다. 멍한 머릿속에 슬픔이 흘러 넘쳤다. 어느 샌가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린이 보고 싶었다. 린에게 만나서 사과하고 싶었다. 이기적이었던 내 모습과 그로 인해 린이 받은 상처에 대해서. 수험 공부를 핑계로 린에게 소홀했던 것, 린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것, 린이 고민하고 있었을 때 함께 해주지 못한 것. 모든 것들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일방적으로 상처만 주고 보내버린 옛 연인이다. 그런 사람은 사과할 권리조차 없는 게 아닐까.


 “젠장.”


 욕이 나왔다. 어차피 지나간 일. 이미 린은 상처를 받아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 상처를 준 사람이다.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그 단순한 사실이 계속 나를 좀먹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맑은 하늘을.


 린은 별을 좋아했다. 호시조라(星凜) 라는 자신의 성 때문 아닐까 하고 배시시 웃던 그녀. 하늘을 바라볼수록 그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린에게 이 경치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린이 보는 하늘과 내가 보는 하늘은 분명 다른 하늘이다. 


 나는 앉아서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서늘한 밤공기가 뺨을 스쳐지나가고 구름이 눈앞을 지나가도 계속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긴지도 짧은지도 체감되지 않는 시간 후에 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후회에 잠겨봐야 변하는 건 없다. 예전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으니까. 이젠 돌아갈 수 없으니까.


 나는 밤하늘을 뒤로 하고 집을 향해 걸었다. 취기어린 머릿속에 후회만 남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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