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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갤문학/단편

리본

벚꽃이 학교를 분홍빛으로 뒤덮던 날, 그 아이는 제 머리카락보다도 붉은 얼굴로 내게 다가와, 언제나 보던 얼굴이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가락으로 머리만 계속 꼬아댔어. 생각해보면 마키짱은 언제나 그랬어. 부끄러울 때면 항상 머리를 꼬고, 칭찬을 해주면 의미를 모르겠다며 틱틱거고. 또 솔직하게 말하는 건 서툴러서 작년 졸업식 때도 아무것도 제대로 말 못했으면서. 정말, 그때는 코토리가 다 힘들었다구. 그래도, 마키짱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은 언제나 강한 마음이 느껴졌어. 그래서 이렇게 벚꽃이 가득 핀 거겠지. 코토리의 마음 속 벚꽃은 이제 봉오리를 닫고 있지만. 이럴 땐 언제나처럼 코토리가 먼저 한마디.


   "마키짱, 무슨 일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멈출 줄 모르는 손가락. 내가 먼저 말을 거니 살짝 놀란 것 같아. 마키짱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고 있어. 그래도, 오늘은 조금 마키짱하고 더 얘기하고 싶어. 그래도 될까? 어차피 부끄럼쟁이 마키짱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지금 마음 속에 담아둔 그 말을 꺼내지도 못할 테지만 말이야. 자, 가자. 부끄럼쟁이 공주님.


   내가 먼저 걸어가니 마키짱이 머리를 꼬면서 뒤따라왔어. 헤헤, 다른 사람이 보면 마키짱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마키짱, 저기 음악실 보여? 마키짱은 언제나 저기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었지. 호노카짱이 그걸 보고 마키짱한테 다짜고짜 같이 아이돌 하자고 했다며? 코토리도 그때 목소리랑 다리가 예쁜 1학년이 있다고 얘기 많이 들었어. 다음날에 호노카짱과 함께 나도 갔었어. 그런데 목소리를 들으니 일어날 수가 없어서, 그땐 마키짱 얼굴도 못 봤어. 정신을 차려보니 호노카짱은 마키짱을 붙잡고 있고. 그래서 여기는 코토리의 시작의 장소야. 그 뒤에도 매일 찾아왔었던 거 몰랐을 거야. 문 밖에서 몰래 듣고 있다 마키짱이 나오면 허겁지겁 도망치고. 그런데 뮤즈 활동이 바빠진 이후론 음악실에서 노래는 잘 부르지 않더라. 옥상에서 열심히 연습하는 마키짱이나 무대에 서서 빛을 내는 마키짱도 좋지만, 내가 모르는 마키짱을 더 보고 싶었어. 그래서 만날 같이 붙어다니는 린짱과 하나요짱을 부러워했는지 몰라. 만약 코토리가 1년만 더 늦게 태어났다면... 아마 그랬으면 마키짱하고 만나지 못했겠지? 아쉬워. 근데, 마키짱. 만약 우리가 정말 같은 학년이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여기까지 잘 따라왔네. 마키짱의 작업실이 음악실이라면 여기는 코토리의 작업실이야. 코토리는 언제나 여기서 뮤즈의 의상을 만들었어. 저기, 마키짱. 그때 비 오던 날 기억 나? 우리가 한창 꿈의 문을 열고 있었을 때, 니코짱하고 가사실에 가는데 갑자기 마키짱이 같이 가고 싶다고 말했었잖아. 때마침 울려퍼진 천둥님이 아니었다면 부끄러운 울음소리가 들켜버렸을 거야. 그때 마키짱이 보는 시선 정말 부끄러웠어. 그래도 좋았어. 한두시간쯤 지나 니코짱은 동생들을 데리러 가고 나와 마키짱만 남았었지. 쏴아아 쏟아지는 빗소리, 두구구 울리는 재봉틀 소리. 그리고 이젠 나만을 바라보는 마키짱. 마키짱이 그랬지. 항상 코토리가 열심히 의상을 만들어줘서 그... 고, 고맙다고. 그때 말야 너무 좋아서 옷을 망친 거 기억나? 당황한 코토리, 더 당황한 마키짱. 마키짱이 그랬잖아, 코토리도 실수를 하는 때가 있구나, 라고. 그야 만날 담담한 척해도 코토리는 언제나 마키짱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는걸. 마키짱도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얼굴을 붉히면서 엄청 좋아하지 않을까? 아, 그래도 역시 마키짱은 의미를 모르겠다면서 머리를 꼬겠구나.


   그래, 마지막은 역시 여기겠지. 옥상. 코토리가, 그리고 마키짱이 뮤즈로서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곳. 니코짱이 있을 때보다 활동은 덜했지만 그래도 정말 즐거웠어. 마키짱, 린짱, 하나요짱. 우미짱, 호노카짱. 그리고 유키호짱, 아리사짱. 모두 함께 해서 정말로 재밌었어. 저기, 밑에 벚꽃이 보여. 작년에도 이렇게 벚꽃을 봤었지. 졸업식 전날 에리짱이 오토노키엔 졸업생이 재학생에게 자기가 쓰던 리본을 주는 전통이 있다 그랬었잖아. 그날은 에리짱은 호노카짱에게, 노조미짱은 우미짱에게, 그리고 니코짱은 코토리짱에게. 코토리는 말야, 교복 단추를 주는 것보다 그게 더 로맨틱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리본은 한 사람이 한 명에게만 주는 거잖아? 기념할 만한 날에 무언갈 받는다는 건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마음을 여러명에게 나눠줘서는 안 돼. 코토리는 사랑하는 단 한 명한테 줄 거야. 그게 마키짱. 마키짱이야. 마키짱, 마지막으로 마키짱이 몰랐던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줄게. 사실 작년 3학년 졸업식 날에 엄청 울었어. 먼저 와서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던 니코짱한테 안겨서 말이야. 코토리가 왜 울었는지 알아? 니코짱의 리본을 갖고 싶어서였어. 그러면 마키짱이 한 번이라도 더 코토리를 봐줄 것 같아서. 그러면 한 번이라도 더 마키짱하고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떼써서 미안해, 그래도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코토리는 이것 밖에 할 수가 없었어. 이제 정말 마지막이야. 여기 리본. 그럼 마키짱, 안녕. 


   묶고 있던 빨간 리본을 풀고, 코토리가 준 니코짱의 리본을 묶는 마키짱. 그래, 잘 어울려. 코토리는 이걸로 괜찮아. 이런 사랑이라도, 코토리는 괜찮아.


********


Epilogue.

   마키짱을 뒤로하고 옥상을 나서. 벚꽃이 활짝 핀 4월인데도 바람은 차가웠고 얼굴은 장마비라도 맞은 것처럼 젖어갔어.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 천천히, 천천히. 초속 5cm로.


   "코토리!"


   등에서부터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 아, 뭐야. 마키짱이 이런 것도 하는구나. 니코짱의 리본을 1년 동안 잘 갖고 있어줘서 고맙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도... 이렇게 안아버리면... 마키짱을 잊을 수가 없잖아...


   "다 됐어"


   마키짱이 건네는 의미 모를 말. 눈물에 번진 화장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돌아보니 머리를 꼬고 있는 마키짱.


   "워, 원래는 졸업생이 재학생에게 리본을 주는 거지만 그 반대가 안 되는 건 아니잖아? 코토리... 짱은 졸업하지만 내 리본을 가져줬으면 해서..."


   그날 얼마나 울었을까. 계절이 여덟 번 바뀔 동안 갖고 있던 서러움이 다 녹을 만큼 울었지. 코토리의 마음 속 벚꽃은 다시 활짝 필 준비를 하고 있었어. 벚꽃이 학교를 분홍빛으로 뒤덮던 날, 언제나 보던 마키짱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코토리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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